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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기고] 시간이 거래되는 세상

[외부기고] 시간이 거래되는 세상

기사승인 2012. 05. 0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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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열(42) 애니맨 대표.
작년 3월이었다. 서울에 폭설이 내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했다. 흔치 않은 일이었다. 

저녁 9시쯤 콜센터로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상담원이 “감사합니다. 생활심부름 애니맨입니다”라고 전화를 받았다. 한 여성이 “혹시 이 시간에 부탁도 들어주나요?”라고 절박하게 외쳤다.

내용은 서울 수서동에 있는 삼성병원으로 과일을 사다줄 수 있느냐는 의뢰였다. 당시는 미끄러운 길과 늦은 시간 때문에 업무를 잠시 중단한 상태. 생활 심부름 업무의 대부분이 오토바이 등의 이륜차를 이용하기 때문에 눈이 오면 곤란한 상황에 처한다. 그날 역시 콜센터로 걸려오는 전화에 “영업이 어렵다”는 안내만 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수서동까지는 20km에 달하는 짧지 않은 거리였다.

상담원이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수화기에서 울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친정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해 계시는데 눈이 너무 많이 와서 올라갈 수가 없어요. 제가 있는 곳은 청주라...” 

그럼 내일 올라오면 되지 않냐고 묻자 “네, 그렇긴 하지요. 그런데 오늘 꼭 엄마에게 대봉감이랑 단감을 사드려야 해서요. 내일 새벽 일찍 큰 수술을 하시는데, 그걸 숨기고 계셨다가 이제 말씀하셨어요”

더 이상 폭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병원 근처에 있는 회사 임원에게 부탁을 해 원하는 과일을 병실로 전달하도록 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그 여성은 몇몇 포털 게시판과 회사 홈페이지에 고마움의 글을 올렸다.

올해로 이 회사를 경영한지 5년이 넘어간다. 사업이 힘들 때는 오기로 견딘 적도 있었지만 뜻하지 않은 기쁨과 보람을 느낄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심부름의 종류도 다양하다. 새벽 두시에 콜센터에 전화를 걸어 “바퀴벌레 잡아주세요” “방문이 밖에서 잠겨서 좀 열어주세요”. 비오는 날에는 “사당역 2번 출구로 와주세요. 그리고 우산을 받쳐주세요”. 김장철에는 딸이 없는 어머님들의 김장도 함께 담궈드리고 이사철에는 아빠가 없는 아이들의 가구를 옮긴다. 

못질이나 여행 중 집에 있는 강아지 밥을 주라는 건 단골 메뉴이고, 외국에서 전화를 걸어 서울에 있는 자택에 들어가 필요한 물건을 택배로 보내라는 부탁도 많다. 가장 어려운 일은 애인과 헤어질 때 대신 말해달라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업체에 부탁하는 심부름들에는 다들 그만의 절박한 이유가 있다. 

세상은 변하고 또 변한다. 그 변화 속에서 사람들은 새로운 직업을 만들어 낸다. 대리운전이 그랬고 퀵서비스가 그랬다. 없던 용역이 이제는 꼭 있어야 하는 직업으로 자리잡으며 세상이 편리해지고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누군가 나를 대신해 해야 할 일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혼자사는 사람들만의 이야기도,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결국은 '시간'이다. 이제 모든 가치는 시간으로 거래된다. 내가 경제적 대가를 지불하면 누군가(아바타) 나를 대신해 용역을 제공한다. 여기서 나는 시간을 얻을 수 있다. 돈을 주고 시간을 사는 세상이 온 것이다.

영화 '인타임(In time)'을 보면 커피 한 잔을 마시더라도 내게 주어진 시간의 일부를 넘겨야 한다. 결국 부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조금씩 수명이 짧아지고, 사회 계급자들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시간을 소유해 수백년을 살아간다.

세상이 변하며 삶의 양적 팽창보다 질적 향상에 대한 고민이 늘고 있다. 그 중심에는 시간이 있다. 

다른 사람의 일을 대신하는 회사를 운영하며 보람과 기쁨도 있지만 아쉬움도 크다. 한국 전통의 공동체에서 있었던 친구, 형제, 이웃의 의미가 퇴색하고 작은 심부름조차 계산이 되니 말이다. 사람들이 돈으로 시간을 사는 동안 서로의 담은 높아져만 간다. 시간이 거래되는 시대의 흐름을 바꿀 수는 없겠지만 서로 조금만 노력한다면 식어가는 인정의 속도는 늦출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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