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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인 칼럼] 박람회에 전시된 ‘조선 동물’

[김영인 칼럼] 박람회에 전시된 ‘조선 동물’

기사승인 2012. 05. 14.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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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세기쯤 전인 1893년 11월 9일, 미국 박람회 출품사무대원(出品事務大員) 정경원(鄭敬源)이 고종 황제에게 귀국 보고를 하고 있었다. 정경원은 시카고에서 열린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 400주년 기념 세계 박람회에 참가하고 돌아와 있었다. 

'실록'에 따르면, 고종 황제와 정경원은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미국의 물색이 얼마나 장관이던가? 
"매우 번창하였습니다."   
- 모두 몇 개 나라가 모였던가?
"47개 나라였습니다. 일본은 대원(大員)을 파견했지만 중국은 대원 없이 상민(商民)을 보내 점포만 배정 받고 있었습니다." 

- 우리도 집 한 채를 지었는가? 
"우리 식으로 6∼7칸 정도 되는 집을 짓고 구운 기와를 덮었습니다." 
- 우리 물건을 보고 어떻게 평가하던가? 
"외국 사람들은 우리나라 물건을 처음 보기 때문에 구경꾼이 번잡하게 모여들어서 미처 응대할 겨를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 어떤 물건을 가장 좋아하던가? 
"옷감, 문발, 자리, 자개장, 수 놓은 병풍 등을 좋아하며 칭찬했습니다. 상패까지 받았는데 아직 문적(文蹟)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자세히는 알 수 없습니다."
- 우리가 출품한 물건값은 얼마나 되는가?
"1,140원어치였습니다." 
- 전시했던 물건은 어떻게 처리했는가? 
"각처의 박물관과 학교 등에 나누어 보냈습니다. 구경할 가치가 없는 것은 의정부에 반납할 예정입니다." 

우리가 참가한 최초의 세계 박람회였다. 전시관을 '전통 한옥'으로 짓고 '한류 상품'을 전시하고 있었다. 서양 사람들의 눈에 이국적으로 보인 덕분에, 인기도 제법 좋았다. 고종 황제는 나라를 빛낸 '참의내무부사' 정경원을 이듬해에 '이조참판'으로 특별히 발탁하기도 했다.    

그리고 10여 년 후, 우리는 치욕적인 박람회 소식 때문에 통곡을 하고 있었다. 1907년에 열린 일본 동경 '만국박람회'를 구경한 조선 유학생이 그 해 6월 6일자 대한매일신보에 눈물로 쓴 글이다. 

"우에노(上野) 공원에서 열린 '명치 40년 박람회'에 입장료 15전을 내고 막 들어가는데, 구경을 마치고 나오던 일본 사람 몇몇이 '조선 동물 2개(朝鮮 動物 2個)가 전시된 게 우습다'고 했다. 조선관을 찾아갔더니 입구에 호랑이 가죽 2수(首)가 걸려 있었다.  호랑이가 포효하는 모습 그대로였다. 이것이 그 '조선 동물'인가 여겼다. 다른 동물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학생은 계속 썼다. 
"그런데 조그만 관이 하나 더 있었다. 입장료는 '대인 10전, 소인 5전'이었다. 컴컴했다. 들어가 보니, 희미한 광선 아래 남자 한 명이 상투 틀고 갓 쓴 채로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는 '대구 사는 김가(金哥)'라며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옆에는 장옷을 머리에 쓰고 눈동자만 내놓은 여자 한 명도 의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들이 '조선 동물'이었다.…" 

일본은 박람회에 멀쩡한 '조선 사람'을 구경거리로 전시하며 으스대고 있었다. 온 나라가 경악과 분노로 치를 떨어야 했다. 

일본이 우리에게 용서를 빌어야 할 것은 '강제 위안부' 문제뿐일 수 없다. 이번 여수 엑스포를 계기로 사과와 반성을 촉구했으면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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