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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경제의 조종”...‘탁상공론’으로 끝난 부도방지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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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원 기자

승인 : 2012. 06. 19.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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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광원의 머니임팩트(제70회) - 부도 또 부도, 재벌붕괴 대행진(1)
삼미그룹이 운영하던 프로야구 원년 구단 '삼미슈퍼스타즈'의 로고.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기간은 내내 경기침체가 계속됐고, 집권 후반기에는 불황이 더욱 심화됐다. 이에 따라 1996년 하반기부터 재벌기업들의 자금난과 부도 관련 루머가 떠돌았다.

재벌붕괴 대행진의 신호탄은 1996년 7월 부도를 낸 건영그룹이었다.


건영그룹은 지난 1977년 11월 건영주택으로 출발해 주력사인 (주)건영과 건영종합건설, 건영종합개발, 건영산업개발, 건영통상, 글로리산업개발 등 계열사들을 확장하면서 중견 건설재벌로 자리 매김 해 왔으나, 1996년 들어 자금난이 악화되면서 7월에 부도가 발생, 이듬해 5월 19일 법정관리에 들어갔다.


오너였던 엄상호 전 회장은 2002년 공적자금비리 수사에서 6700억원의 대출사기, 500억원의 계열사 부당 지원, 120억원의 비자금 조성 및 횡령, 5억원 뇌물제공 등의 혐의로 구속돼 1심에서 징역 3년, 2심에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건영은 2006년 11월 LIG그룹에 인수돼 LIG건영으로 바뀌었다.



1997년 들어서는 1월 23일 한보그룹의 부도를 시작으로, 정상급 재벌들의 부도사태가 현실이 되고 말았다.


1997년에만 부도를 낸 재벌기업은 한보그룹, 삼미그룹, 진로그룹, 대농그룹, 한신공영, 기아그룹 및 태일정밀 등 8개에 달한다. 가히 '부도 도미노', '재벌 붕괴 대행진'이었다.


"한보그룹의 부도는 정부의 산업정책이 종래 정부주도 일변도에서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을 예고하는 선언이었으며, 동시에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로 편입되는 신호탄이었다. 이른바 개발경제시대에 조종을 울린 것이다.


1996년 9월 9일 한국은행은 국제결제은행(BIS)에 가입했으며, 그 해 10월 11일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9번째 회원국으로 정식 가입했다. 


이후부터 한국경제의 운용방식은 종래 정부주도 방식에서 시장기능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전환하는 한편, 시장기능 회복을 위한 추진작업은 1997년 3월 5일 취임한 강경식 부총리가 전담했다.


정부정책이 정부중심에서 시장기능중심으로 전환한 것을 확인한 채권은행들은 한보그룹에 대한 지원을 중단, 한보그룹이 붕괴됐다.


이후 삼미, 진로, 대농 등 중견 재벌그룹들의 부도가 잇따랐다.


재벌들의 잇단 좌초에 대해 강 부총리는 '기업들의 부도여부는 전적으로 해당 기업과 채권은행이 알아서 할 일이다. 시장경제원칙에 의거, 기업이 부도나면 이제부터는 경영의 책임을 묻겠다'며, 시장기능에 의존한 기업들의 구조조정을 천명했다" (이한구, 《한국재벌사》)


한보그룹의 뒤를 이어 무너진 정상급 재벌은 재계 서열 17위의 삼미그룹이었다.


삼미그룹은 1959년 제재업 및 목재가공업체인 대일목재공업으로 출발, 광업과 특수강, 해운, 기계 및 금속공업, 건설업 등에 진출하면서 재벌로 도약했다.


1980년 창업자인 고 김두식 회장의 사망으로 삼미그룹은 2세인 김현철 회장체제로 전환한다.


하지만 제2차 석유파동의 영향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던 삼미그룹은 1985년 재무구조 개선 차원에서, 그룹의 상징이던 31빌딩과 프로야구단 '삼미슈퍼스타즈'를 매각한다.


이후 김현철은 특유의 공격경영으로 적극적인 사업다각화에 나선다. 이에 따라 1980년대 말에는 모 기업인 (주)삼미를 비롯해 삼미특수강, 삼미금속, 삼미화인세라믹스, 삼미기술산업, 유나백화점 등을 거느리게 됐다.


뿐만 아니라 1989년엔 3억 달러를 들여 북미지역의 특수강공장 4개를 인수, 캐나다에 '삼미아틀라스'와 미국에 '삼미알텍'을 각각 설립한다. 인수 직후 총 3000억원을 집중 투자해 삼미아틀라스와 삼미알텍의 생산능력을 100만톤 규모로 확대함으로써, 삼미그룹은 마침내 외형에서 재계 랭킹 17위의 대재벌로 부상했다.


1990년대 초에도 삼미특수강 창원공장의 생산능력을 50만톤 규모로 확대하고자 3000억원을 투입하는 등, 가용재원을 총동원해 특수강 생산능력 확대에 주력했다.


그러나 이것이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지나친 사업확장으로 재무구조가 악화되고 있는 와중에서, 특수강시장의 장기 불황이 겹치면서 북미지역 공장들은 인수 후 4년 연속 적자를 기록했고, 국내에서도 누적채무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위기에 직면한 삼미는 자구책을 위해 1992년 한성자동차서비스와 심미켄하의 지분을 처분하고 1993년 방배동 사옥을 팔았으며, 이듬해에는 삼미금속 파주 및 진주공장과 비바백화점의 인천 만석동부지 등도 매각했다. 


유사 계열사도 통폐합하고, 김현철은 1995년 말 경영난에 빠진 북미공장에 전념코자, 회장직을 동생 김현배에게 인계했다.


그럼에도 그룹의 경영난은 더욱 악화돼 자기자본비율이 30대 그룹 중 최저치인 2.9% 수준이 됐고, 이자부담액만해도 삼미특수강 총 매출의 30%에 달할 정도였다.


1996년 후반이 되자 삼미의 도산 루머가 나돌기 시작했다.


삼미는 1997년 들어 삼미특수강 창원공장의 봉강 및 강관공장을 포항제철에 7194억원에 매각, 재무구조 개선에 사용하는 한편, 주거래은행인 제일은행에 긴급지원을 호소했다. 


그러나 당시 제일은행도 유원건설 부도와 한보사태의 직격탄을 맞아 대규모 부실채권이 발생, 삼미에 대한 지원이 어려웠다.


마침내 1997년 3월 13일 1차 부도가 난 후, 3월 19일 삼미특수강과 (주)삼미, 삼미금속 등이 차례로 법정관리를 신청하면서, 그룹이 해체되고 말았다.


1996년 말 현재 삼미그룹은 총 자산 2조5378억원에 총부채는 2조5937억원으로 559억원의 자본잠식 상태였다. 매출은 1조4925억원으로 부채보다 1조원 이상 적고, 금융비용도 2670억원에 달해 2478억원의 적자가 발생했다.


삼미그룹의 좌초로, 국내 금융권에는 8469억원의 부실채권이 추가로 발생했다.


삼미그룹의 도산은 정부로서도 충격이었다. 뭔가 대책이 필요했다.


3월 15일 대기업 부도처리에 대한 긴급 조찬모임이 열렸다. 참석자는 강 부총리, 임창열 통상산업부장관, 김인호 청와대 경제수석, 이경식 한국은행총재, 김시형 산업은행총재, 이수휴 은행감독원장, 이동호 은행연합회장, 윤진식 청와대비서관, 윤증현 재정경제원 금융정책실장 등.


강 부총리는 회고록 《강경식의 환란일기》에서 이렇게 술회했다.


"법정관리로 가기에 앞서, 은행 자체에서 처리할 수 있도록 투명한 절차를 만들고, 또 이를 바탕으로 관련 금융기관간의 협의절차를 만들기로 했다. 그 다음에는 성업공사(현 자산관리공사)에 넘겨서 법정관리 여부를 판단, 그에 따른 절차를 성업공사가 맡아서 대행하게 하는 방안에 대해 의견교환을 했다.


대기업의 부도가 '특별한 현안'이 아닌 금융업의 '일상적인 비즈니스의 일환'이 되도록 함으로써, 한보사태와 같이 '사건화'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방안을 찾자는 것이었다.


부도가 나면 금융기관의 부실채권이 늘어나게 되므로, 결국 부실채권정리를 일상화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게 되면, 부도나 부실채권정리가 일상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게 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내 구상의 요지였다"


그의 이런 이상론과 관계없이, 시중에서는 "5대 그룹을 빼고는 다 위험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기업 부도설이 끊임없이 나돌았다. '금융대란설'이니, '위기설'이니 해서 돈이 돌지 않아, 멀쩡한 중견기업도 부도에 몰릴 판이었다.


강 부총리는 3월 25일 은행장들과 오찬을 함께 하면서 금융경색이 오지 않도록 배려해 줄 것을 당부하고, 4월 3일 윤증현 금정실장에게 금융대란에 대한 비상대책을 준비시켰다.


대기업 부도의 해법으로 정부 실무진이 만든 결과물이 '부도방지협약'이었다. 


부도에 직면한 대기업의 주거래은행이 요청하고 채권은행들이 합의하면, 3개월 동안 그 기업에 대한 어음을 교환에 돌리지 말자는, 일종의 은행간 협정을 만들어 운영하자는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협정기간 동안에는 부도를 내지 않게 되므로, 부도를 방지하는 결과가 된다는 것.


이 아이디어는 1987년 처음 만들어진 금융단 협약인 '기업정상화를 위한 금융기관간 협정'에서 본 딴 것으로, 그 동안 활용이 안되고 사장돼 있는 상태였다.


"우리 실정에 딱 맞는 제도였다. 부도를 내지 않을 수 없는데도 부도를 내지 말라는 대통령의 지시 때문에 고심해야 하고, 그렇다고 별 뾰족한 대책도 없는 답답한 처지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묘책이라는 생각에, 매우 만족스러웠다. 그렇다고 끝까지 부도를 내지 않는 것은 아니어서, 퇴출해야 할 기업은 협약기간이 끝난 다음에 부도처리를 하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경쟁력이 있는 데도 한때의 자금부족으로 부도에 몰려 쓰러지는 기업은 줄어들 수 있다. 부도를 일시 유예해주어 재생기회를 주자는 것이었다" (위 《강경식의 환란일기》)


그러나 부도방지협약은 비록 자율적 합의에 의하고 일시적이라고는 하나, 정당한 채무상환을 동결시킨다는, '83조치'에 버금가는 특단의 처방이었다. 대기업 부도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채권자와 채무자가 사전에 협의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를 제공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된 고육책이었다.


그러나 은행권과 제2금융권 등 채권금융기관 간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아, 이 제도는 제대로 빛도 보지 못한 채, '탁상공론'으로 폐기되고 말았다.


윤광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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