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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고대화의 멋잇는 음식 이야기]봄날은 간다-곰취

[칼럼][고대화의 멋잇는 음식 이야기]봄날은 간다-곰취

기사승인 2013. 04. 0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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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방창(萬化方暢), 이제 완연히 봄입니다. 전번에 전북 정읍에 봄맞이 갔을 때, 종일 구경 잘하고 저녁때 회식을 했습니다. 막걸리 한 주전자 시키면 안주가 셀수도 없이 따라 나오는 <말자네 집>, 분위기가 무르익어 다들 거나해졌을 때 입니다. 일행 중 한 분이  팝송 <Spring is gone>을 부르겠다며 일어나서는,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로 시작되는 옛 노래 “봄날은 간다”를 부르시는 겁니다. 막걸리에 취해, 분위기에 취해, 봄에 취해 그 노래를 듣습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 손로원 작사, 박시춘 작곡, 백설희 노래>

1953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봄노래는 봄의 화사함에 어울리는 밝은 분위기여야 한다는 일반적인 전형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너무 화사해서 오히려 슬픈 봄날이라고 하는 역설이, 오랜 전쟁에 시달린 국민들의 한 맺힌 마음에 깊은 공감을 불러일으켜서 이내 엄청나게 히트를 했습니다. 

어느 시인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라는 첫 구절을 부를 땐 아무렇지도 않더니,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따라 울던' 이 대목을 부르고 나면 나도 모르게 가슴속에 슬픈 무엇이 느껴졌고 눈물이 나려고 했다."라고 썼습니다.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우는” 연인은 또 얼마나 낭만적인지요. 가수 백설희는 맑은 목소리이지만 무언가 체념한 듯한 목소리로 봄날 사랑을 잃고 상심에 젖은 여심(女心)을 노래했습니다.

참, 그이야기 들어보셨나요? 1953년 지리산에서 국군 토벌군에 쫓기던 남부군들이 먹을 것이 없어서 잔설을 뚫고 올라온 곰취로 죽을 끓여 먹으며, 이 노래를 목 터지게 불렀다는 이야기요. 어느 책에서 그 이야기를 읽으며, 어떤 기분이었을까 상상해본일이 있습니다. 남도 허름한 막걸리집에서 구슬픈 ‘봄날은 간다’를 들으며, 곰취죽을 생각합니다.

사실 어른들이야기를 들으면, 옛날에는 쌀이 없어 죽을 끓여먹으려고 봄이 오면 산나물을 캐러 온통 산을 뒤지고 다녔다는 이야기를 수없이 들었지요. 음식이 넘쳐나는 요즈음엔 먼 이야기로 들립니다만, 사실 옛날 보릿고개 때 쌀이 없어 산나물로 죽을 끓여먹었다는 이야기는 그리 오래된 게 아닙니다.

곰취죽을 먹고, 화사하다 못해 눈부신 봄날, 지리산 양지쪽에 앉아 반합통을 두드리며 불렀다는 남부군들의 십팔 번 ‘봄날은 간다’를 듣고 있으니, 슬픈 시절의 역사 탓인지 막걸리 탓인지 왠지 가슴 한구석이 먹먹합니다.

곰이 한겨울엔 배가 고프면 굴 속에서 기어나와 그 싹을 먹고 기운을 차린다 해서 곰취라 불린다지요. 취라는 글자가 뒤에 붙는 유사한 국화과 식물들을 모두 합쳐 그저 취나물 이라고 부르지만 유독 곰취만은 제 이름을 불러 준다고 합니다.

곰취는 생으로 먹을 수 있는 몇 안되는 유용한 산나물로, 4월부터 6월까지 어린 잎새를 따서 생으로 쌈을 싸 먹으면 쌉쌀하면서도 오래도록 입안에 남는 향기가 일품이어서 '산나물의 제왕'이라고도 불립니다. 

이파리의 연한 조직감과 곰취 특유의 강렬한 향 덕분인데, 특히 삼겹살을 곰취로 싸 먹을 때의 효과는 정말 대단하더군요. 역시, 쌈으로 상추나 깻잎에 비할 바가 아니더군요. 곰취의 알싸하고 쌉싸래하고 상큼한 맛이 봄을 그대로 느끼게 합니다. 쌈을 씹을수록 배어나오는 담백하고 독특한 맛과 향이 돼지고기의 누린내를 확실히 잡아줍니다.

‘봄날은 간다’의 느낌처럼, 아릿하고 알싸한, 조금은 씁쓸한 마치 첫 사랑같은 맛. 들이나 밭이 아니라, 산이 생각나는 이 뚜렷한 맛. 이 강한 향기와 담백한 맛은 삶아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입니다.

곰취는 기침과 천식 및 가래억제는 물론 현대인의 주요 질병인 고혈압, 콜레스테롤 중성지방, 고지혈증, 피로회복 등에 좋다고 합니다. 최근엔 재배도 합니다만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야생 곰취밖에 없었고, 산에 가면 지천이었는데 근래 도시민들이 산나물을 뜯으러 다니면서 야생 곰취가 급격하게 사라졌답니다.

한 포기에 잎사귀 몇 장은 남겨두고 뜯으면 곰취가 생명을 유지하고 계속 잎을 채취할 수 있는데, 이를 알지 못하거나 욕심 많은 도시민들이 포기째 뽑아 그렇게 된 것이라니,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물론, 산에서 나는 야생 곰취가 향이나 맛이나 재배하는 것보다 훨씬 좋지요.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뜬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개인적으로 매우 좋아하는 ‘봄날은 간다’ 3절입니다. 지리산에도 봄이오고, 반야봉에도 곰취는 피어나겠지요. 곰취죽의 슬픈 역사를 생각하면서, 이번 주말에 벗들과 다시 한 번 삼겹살구이에 곰취를 싸먹으려고요. 낭랑한 목소리로 ‘봄날은 간다’를 부르던 백설희는 지금 없지만, '봄날은 간다'를 향한 한국인의 사랑이 결코 변하지 않을 것 처럼, 배고픈 시절 곰취죽에 얽힌 우리의 이야기도 오래도록 기억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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