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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봉규의 진짜힐링 가짜힐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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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13. 05. 26.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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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식이의 비애
                   
인터넷을 뒤지다 보면 흥미롭지만 뒷맛이 개운치 않은 글들이 있다. 예를 들면 나이가 들수록 필요한 5가지가 남성에겐 마누라, 아내, 애들 엄마, 집사람, 그리고 와이프라고 한다. 

반면 여성은 딸, 돈, 건강, 친구, 그리고 찜질방 순인데 씁쓸하게도 남편은 없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남성이 아예 없다. 이 정도라면 은퇴 후 집에서 밥 달라고 보채는 삼식이 시리즈도 이해가 간다. 

밖에서 식사를 해결하는 ‘영식님’부터, ‘일식시’, ‘이식씨’, 새 끼를 전부 달라하는 ‘삼시XX’ 그리고 간식까지 챙겨먹는 ‘간나XX’까지. 그런데 남편에 대한 불만이 아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엄마는 예뻐해 주고, TV는 재미있고, 냉장고엔 먹을 것이 많은데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는 아이들도 있다하니 말이다. 

남성들이 점점 ‘밥 먹는 모습도 꼴 보기 싫은 존재’로 전락해가고 있다. 실제 전체이혼의 60% 정도가 40-50대의 중년이고 그중 80-90%는 여성이 이혼‘하고’ 남성은 이혼‘당하는’ 실정이다. 

이렇게 평생 제 딴에는 뼈 빠지게 일하고 가정에서 쫓겨나는 초라한 남성은 억울함과 분노로 시작하여 순차적으로 외로움과 무력감 그리고 우울감을 지나 급기야 자살충동까지 느끼게 된다. 

해나 로진은 이러한 상황을 남성 우위의 시대가 저물고 여성지배의 시대가 오는 <남자의 종말>로 분석한다. 그리고 마이클 길버트같은 이들은 남성이 <일회용 남자>로 폐기처분될 위기에 빠져있다고 우려하고 있다.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은 삼식이를 대하는 여성의 매몰참에 놀래면서도, 오랜 세월 동안 고유한 ‘나’로서의 삶이 억압된 채, 가정주부로서의 삶이 강요되어온 그 여성에 대해서는 별로 놀란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밥 짓고, 애 키우고, 집안 살림하는 기능적 존재로 살 때 인간은 소외와 함께 외로움과 공허를 느낄 수밖에 없다. 여성은 그러한 존재로 규정되고 개인적 행복은 억압된 채 살아왔다. 그런데 프로이트는 억압된 것은 반드시 되돌아온다고 경고한 바 있다. 

그리고 융에 따르면 그것이 되돌아올 때 상상할 수 없는 파괴적 형태로 올 수 있다. 따라서 삼식이시리즈는 그 파괴성의 기호이고, 그런 의미에서 삼식이의 비애는 정의의 실현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정의의 실현이 과거의 아픔을 녹일 수는 없다는 것, 그리고 때로는 새로운 아픔을 불러 올 수 있다는 사실이다. 관계 내에 존재하는 모든 고통은 일방적이지 않다. 언제나 그렇듯이 문제는 홀로 오지 않으며, 슬픔도 나만의 것은 아니다. 

많은 이들이 남성의 위기를 말하며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간과하고 있다. 그것은 그 위기가 결코 여성의 행복을 의미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위기는 엄밀히 말해 관계의 위기이기 때문이다. 

삼식이를 내쫒고, 여성이 원하는 5가지 조건이 채워지면 행복할까? 그 다섯 가지를 자세히 관찰해보자. 건강하고 돈이 있어 찜질방에서 즐기지만 딸이든, 친구이든 관계와 만남을 필요로 하고 있다. 

남편이 친구와 딸로 대체되고 있다. 문제는 그들이 진정한 대역을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딸에겐 애인이 그리고 남편이 생길 것이다. 친구에게도 기본적으론 돌아가야 할 가정이 있다. 물론 혼자 사는 친구일 수 있다. 

그래서 매일 함께 찜질방에서 계란 까먹고 식혜 먹으며 몇 시간씩 수다 떨 수 있다. 그러면 정말 나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공허가 채워질까?

같은 공간에 있음이 만남은 아니다. 함께 노래방가고 술 마신다고, 찜질방에서 계란 까먹으며 수다 떤다고 만남은 아니다. 

물론 결혼해서 애 낳고 수 십 년을 한 이불 덥고 잔다고 만남인 것도 아니다. 만남은 애 낳아 키우기도, 한 이불 덥고 오래 자기도 아니기 때문이다.

불쌍한 삼식이에게 출산의 지혜를 가르쳐주자. 정자와 난자의 결합체인 수정란은 배아로 증식하며, 엄마의 자궁에 안전하게 착상된 채 자라게 된다. 


그런데 많은 엄마들은 산모로서 자신이 아기를 죽이려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무슨 말인가? 산모의 몸은 배아를 이물질, 즉 침입자로 판단한다. 

이유는 염색체의 반이 남성에게서 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은 항체를 만들어 아기를 죽이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는 정상적으로 자란다. 사실은 이 부분이 신비이다. 한번 스토리중심으로 재구성해보자. 엄마가 아기를 죽이려 할 때 아기가 말한다.

“엄마 잠깐! 먼저 제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뭔데?”
“저는 엄마를 해치려 들어온 침입자가 아니예요. 엄마와 약 10개월 가까이 아름다운 만남을 만나러 들어온 친구랍니다.”

“네가 침입자가 아니라는 증거가 있니?”
“네! 그 증거로 엄마와 저 사이에 삼팔선을 만들어 드릴게요. 그리고 절대로 그 선 너머로 엄마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을 거예요!”

아기 쪽에서 엄마와의 경계를 위해 만들어내는 삼팔선은 바로 태반이다. 태반은 아기 쪽에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사실은 인간관계에 있어 중요한 점을 시사하고 있다. 

태아는 엄마의 소유가 아닌 타인이다. 만남은 진정 타인임을 인정할 때 시작된다. 그 존재가 내 맘대로 판단하고 규정할 수 없는, 고유한 타자성을 지닌 존재임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무슨 말인가? 내 아내는 그냥 가정주부가 아니고, 내 남편도 돈벌어오는 기계가 아님은 물론, 더 나아가 그 사람은 내가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한다. 

진정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 진정 이해할 수 있음의 시작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이 만남의 출발점이다. 길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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