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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가는 조선 사신의 길에서 고려를 만나다

중국 가는 조선 사신의 길에서 고려를 만나다

기사승인 2014. 07. 25. 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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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광원의 이야기가 있는 걷기(제108회) - 의주길
‘의주길’은 조선시대 한양과 중국을 잇던 의주대로(義州大路)를 중심으로 경기도가 2년여 에 걸쳐 조성한 트래킹코스로, 고양시 삼송역 8번 출구에서 파주시 임진각에 이르는 장장 52.7km 구간의 긴 길이다.

의주대로는 사신과 상인들이 중국으로 갈 때 이용해 ‘조선 제1로’ 또는 연행로(燕行路)로 불렸다. 이 길을 통해 수입된 서구 문명과 기술은 북학운동의 촉매제가 되기도 했다.

의주길 주변에는 김지남 묘, 벽제관지, 용미리 마애석불입상, 윤관 장군묘, 화석정 등 많은 문화유산들이 있어 역사체험과 교육효과도 높다.

의주길은 제1길 ‘벽제관길(삼송역~벽제관지. 7.6km)’, 제2길 ‘고양관청길(벽제관지~용미3리. 6.2km)’, 제3길 ‘쌍미륵길(용미3리~신산5리. 14km)’, 제4길 ‘파주고을길(신산5리~선유삼거리. 11.6km)’ 및 제5길 ‘임진나루길(선유삼거리~임진각, 12,7km)’로 이뤄져 있다.

이중 가장 긴 쌍미륵길 가운데 용암사(龍岩寺)에서 시작해 광탄면사무소에 이르는 약 11km 구간을 걸어본다.

지하철 1·4호선 서울역에서 9-1번 출구로 나오면 서울역환승센터다. 환승센터 6번 승강장에서 703번 버스를 탄다. 703번 버스는 서울역에서 파주 자이언트부대까지 가는, 입석 서울시내버스 중에서는 3번째로 긴 노선이다.

서울과 고양시내 구간을 지나 용미리 용암사에서 내렸다.

용암사는 장지산(長芝山)이란 낮은 산에 있는 절이다. 고려 중기인 11세기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용암사의 상징인 마애이불입상(磨崖二佛立像)과 이 절의 창건 관련 설화 때문이다.
의주길1
고려 중기에 처음 창건된 용암사
고려 제13대 선종(宣宗. 재위 1083~1094)은 셋째부인인 원신궁주 이씨까지 아내로 맞았으나 후사가 없었다. 이것을 걱정하던 궁주의 어느 날 꿈에 두 도승이 나타나 “우리는 장지산 남쪽 기슭 바위틈에 사는데, 배가 너무 고프니 먹을 것 좀 주시오”라고 요청하고 사라졌다.

궁주가 이를 왕에게 고하니 왕이 사람을 보내 알아보게 했다. 곧 장지산 아래에 사람 형상의 큰 바위 둘이 서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왕은 이 두 바위에 불상을 새기고 절을 지어 불공을 드렸더니, 궁주에게 태기가 있었고 왕자가 태어났다고 한다.

절은 전란으로 소실됐다가 1930년대 재건됐고 혜음사, 대승사로 불리다가 용암사로 바뀌었다.

산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대웅보전과 석등, 5층 석탑과 범종각이 있는데 석등과 범종은 고 박정희 (朴正熙) 전 대통령이 조성한 것이다. 또 대웅전 왼쪽 구석에 있는 투박한 동자상과 7층 석탑은 1954년 고 이승만(李承晩) 전 대통령이 용암사를 방문, 세운 것이라고 한다.

동자상 옆 계단길을 100여m 오르면, 보물 제93호 마애이불입상이 우뚝 서 있다.
의주길2
의주길의 최대 볼거리, 보물 제93호 마애이불입상
거대한 천연 암벽에 2기의 마애불을 새겼는데 머리에 돌 갓을 씌운 토속적인 분위기다. 왼쪽은 둥근 갓을 썼고 오른쪽은 4각형 갓을 쓰고 있는데 둥근 갓은 남상(男像), 네모진 갓은 여상(女像)이란다. 세속적인 특성이 잘 나타나는 고려시대 지방화된 불상의 대표작이다.

의주길 제2길을 쌍미륵길이라 이름붙인 것도 이 두 불상 때문이다.

의주길은 용암사 밖 도로인 ‘혜음로’로 이어진다. 차량들이 씽씽 달리는 인도도 없는 편도 1차선 도로를 조심스럽게 걷다가 용미1리 삼거리에서 길을 건넌다.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간다.

장수마을을 통과해 포장된 마을길을 계속 따라간다.

오른쪽에 한국정교회(韓國正敎會) 묘지가 있다. 한국정교회는 한국의 동방정교회, 즉 카톨릭도 개신교도 아닌 그리스정교회 소속이다. 초기 기독교의 교리를 따르고 있으며 1897년 주한 러시아 공사였던 볼랴노프스키가 본국에 사제 파송을 요청, 정교회의 한국 전래가 이뤄졌다.
의주길3
한국정교회 묘지
이런 한적한 길에서 소수 종파인 정교회를 만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흙 속에서 진주를 캔 기분이다.

다시 도로와 만나면 우측으로 간다. 조금 가면 추모공원을 지나 오른쪽으로 흙길이 있다.

두 갈래 길에서 왼쪽 고산천(高山川)을 따라간다. 조금 가다가 은곡교 다리를 건너 반대편 둑길을 걷는다. 한적한 길 왼쪽에는 듬성듬성 공장들이 있고, 물 맑은 고산천과 건너편 숲에는 학도 심심찮게 날아든다.

다시 차도와 만나는 다리를 건넜다. 사거리에서 왼쪽 마을길을 따라 간다. 매운탕집이 유난히 많은 길이다.

‘우승슈퍼낚시’ 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야 한다. ‘베들레헴쉼터’와 전주이씨 효령대군파 임강부정종회의 추모공원인 선덕원(宣德園) 앞을 지나고, 공장지대를 거쳐 분수2교를 건넜다. 그러자 윤관장군묘 가는 길 안내판이 보인다.

오른쪽 뚝방길을 따라 계속 걷다가 왼쪽 마을길에서 좌회전, 조금 더 가면 대로가 나온다. 큰 길을 건너 오른쪽에 윤관장군묘역 입구가 있다.
의주길6
여진을 정벌한 고려 명장 윤관장군묘
윤관(尹瓘) 장군은 고려 중엽 여진을 정벌하기 위해 별무반(別武班)을 창설, 이들을 이끌고 여진 땅 북간도까지 진격해 9성을 쌓았다. 그러나 여진은 9성의 환부와 강화를 간청했고 고려 조정은 9성을 지키기 어렵다 하여 여진에게 돌려줬다.

먼 훗날, 병자호란으로 조선의 항복을 받아낸 청나라의 기고만장한 사신들도 의주대로상의 장군 묘역 앞을 지날 때는 모골이 송연했으리라.

현충문 앞을 지나 왼쪽 묘역으로 들어서니, 멀리 장군의 묘소가 올려다 보인다.

홍살문 앞에서 오른쪽 길을 따라 올라가 장군묘 앞으로 올라서니, 인근 마을과 들판이 모두 내려다보인다. 장군의 묘역 정비는 400년간 이어져 온 후손 파평 윤씨(波平 尹氏)와 청송 심씨와의 갈등이 풀려 가능해졌다. 청송 심씨 묘소들은 장군묘 담 뒤에 몇 기 남아있다.

다시 광탄천변 뚝방길로 내려와 의주길을 걷는다
의주길7
광탄천
파주시 광탄면을 관통하는 광탄천(廣灘川)은 ‘넓은 여울’이란 뜻이다. 양주시 백석면과 광적면에서 흘러 내려오는 물이 합쳐져 이 곳에서 넓은 여울이 되어 흐르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여름날 천변에는 개망초 꽃이 지천에 피어 있다.

의주길은 신산5리를 지나 제4길 파주고을길로 이어지지만, 광탄교를 건너 다시 오른쪽 도로를 따라 반대편으로 되짚어 올라가니 광탄면 사무소가 나온다. 여기서 다시 703번 버스를 타고 서울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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