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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학규, 21년의 정치인생.. ‘소박했던, 행복했던’ 마지막 회견

손학규, 21년의 정치인생.. ‘소박했던, 행복했던’ 마지막 회견

기사승인 2014. 07. 31.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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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 손학규에서 '시민 손학규'로..
'너무나 쿨해서 더 아쉬워'.. 신사의 미소 잃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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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투데이 이병화 기자 = 7·30 국회의원 재보궐선거 수원 팔달에 출마해 낙선한 새정치민주연합 손학규 상임고문이 31일 국회 정론관에서 긴급기자회견을 갖고 “정치인은 선거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오랜 신념”이라며 “저는 이번 7·30 재·보궐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겠다”고 밝히며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있다./이병화 기자photolbh@
손학규 새정치민주연합 상임고문이 31일 7·30 재·보궐선거 패배를 뒤로하고 스스로 정치 인생의 막을 내렸다.

정치계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거물 정치인의 21년 정치 여정을 매듭짓는 자리라고 하기엔 소박한 기자회견이었다

‘여의도 신사’로 불리던 손 상임고문은 은퇴 선언을 하는 동안 미소를 잃지 않으며 신사로서의 자태를 잃지 않았다.

회견 도중 “지금은 제가 물러나는 것이 순리라고 생각했다”고 말할 때는 잠깐 감정이 격앙되기도 했으나 금세 웃음을 되찾았다.

정계 은퇴 기자회견을 지켜보던 기자들 사이에선 손 상임고문의 밝은 표정이 더 슬프게 다가왔다는 평가가 나왔다.

손 상임고문은 청년 시절부터 민주화 운동으로 두 번 투옥되고, 2년 넘게 수배를 당한 대표적 재야인사 중 한 명이었다.

1947년 경기도 시흥에서 태어난 그는 경기고와 서울대 정치학과 재학 시절 한일협정 반대투쟁에 참가하는 등 일찌감치 뚜렷한 사회참여 의식을 보였다.

당시 법대에 다니던 고(故) 조영래 변호사, 상대에 다니던 고(故) 김근태 전 의원과 함께 서울대 운동권 ‘3총사’로 불리며 학생운동을 주도한 것으로 유명하다.

군 제대 이후에는 소설가 황석영 씨와 함께 자취를 하며 구로공단에서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1970년대 반유신 독재투쟁의 선봉에 섰던 그는 1979년 부마항쟁 때 체포돼 심한 고문을 당하다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로 겨우 풀려났다.

이듬해인 1980년 영국 유학을 떠나면서 정치학자로 변신, 1988년 옥스퍼드대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인하대와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진보정치 이론가로 명성을 날리던 손 상임고문은 1993년 정치개혁 의지를 천명한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 의해 발탁돼 민자당 소속으로 광명을 보궐선거에서 당선, 정계에 발을 들였다.

초선으로는 드물게 당 대변인으로 기용되는 등 당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1996년 15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한 뒤 보건복지부 장관과 한나라당 총재 비서실장을 차례로 역임하며 탄탄대로를 걸었다.

1998년 지방선거에서 경기지사에 도전했다가 고배를 들었으나, 16대 총선을 통해 3선을 달성한 데 이어 2002년 경기지사 재도전에서 결국 승리를 거머쥐며 단숨에 대선주자급 거물로 발돋움했다.

지난 2006년 경기지사 임기를 마친 후, 농·어촌과 탄광 등 전국 곳곳을 돌아보는 ‘100일 민심대장정’은 서민들에게 ‘손학규’의 강렬한 이미지를 남겼다.

그러나 손 상임고문은 2007년 3월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방식의 한계를 지적하며 탈당, 대통합민주신당에 입당하며 야당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당시의 정치적 결단은 많은 유권자들에게 ‘철새’ 정치인이라는 인식을 남겼으나 야권 정치인으로 보여준 선명성은 인식을 지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대선 패배 직후인 2008년 초 당 대표로 구원등판해 총선을 진두지휘하며 ‘정치 1번지’인 서울 종로에 출마했으나, 한나라당 박진 의원에게 무릎을 꿇어 당적 변경 후 연패의 아픔을 맛보기도 했다.

이후 춘천 칩거에 들어갔던 손 고문은 2010년 지방선거 패배 후 다시 당 대표로 선출되며 화려하게 부활, 이듬해 4·27 재보선에서는 민주당의 ‘사지(死地)’인 경기 분당을에서 강재섭 전 한나라당 대표를 꺾으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러나 2012년 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문재인 의원에게 패배하며 또다시 고배를 마셔야 했다.

지난해 8개월 간의 독일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손 고문은 고심 끝에 이번 7·30 재보선에서 다시 한 번 여당의 ‘텃밭’인 경기 수원병(팔달)에 몸을 던졌다.

하지만 지방의 텃세를 끝내 이기지 못하고 쓴 패배를 맛봐야 했다. 팔달에서 당선될 경우, 차기 당권은 물론 대권주자로서의 입지를 다질 것으로 관측됐으나 재보선에서 패배하면서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결국 손 상임고문의 선택은 ‘시민 손학규’였다. 그는 “시민의 한사람으로 돌아가 성실하게 살아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정치권을 향한 고언을 아끼지 않았다. 손 상임고문은 “이번 선거 슬로건으로 ‘문제는 정치다. 민생에 답하라’를 내세웠다. 정치가 바로서야 민생이 바로 선다”며 “국민을 어렵게 알고 국민을 두려워 하는 정치를 해야한다. 국민을 주인으로 섬기는 민주정치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정치인 손학규’로서의 마지막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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