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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년 평양에 등장한 ‘가짜 김일성’

45년 평양에 등장한 ‘가짜 김일성’

기사승인 2015. 04. 13.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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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백두혈통, 뿌리부터 짝퉁
소련, 자국 꼭두각시로 박헌영 제치고 김일성 낙점
김일성
1945년 10월 14일 평양 군중대회에 등장한 ‘가짜 김일성’. 백발이 성성한 노장군을 기대했던 평양 군중들의 눈 앞에 나타난 인물은 30대 초반의 새파란 젊은이였다. 이 젊은이는 소련이 김일성으로 날조해서 등장시킨 김성주(金聖柱)였다.
<광복 70주년, 창간 10주년 특별기획>

[종북의 뿌리, 김일성 바로 알기 6편]

아시아투데이 최영재 기자 = 1945년 10월 14일 평양의 군중대회에 오랜 기간 민족해방투쟁을 벌여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던 ‘김일성 장군’이 등장했다. 그러나 백발이 성성한 노장군을 기대했던 평양 군중들의 눈 앞에 나타난 인물은 30대 초반의 새파란 젊은이였다. 이 젊은이는 소련이 김일성으로 날조해서 등장시킨 김성주(金聖柱)였다.

소련은 왜 이 젊은이를 김일성 장군으로 왜곡해서 등장시켰을까? 1941년 6월 22일 돌연 히틀러의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하자 극동에서 이에 부응하듯 일본군도 소만국경에 대병력을 이동 배치했다. 일본과 소련의 전쟁은 불가피한 것처럼 보였다.

이 때 소련 내무성 대일첩보부는 소만 국경 지리에 밝은 김일성(4번째 김일성, 김좌진을 암살한 金一星) 부대를 사용해 만주에서 소련과 싸울 준비를 하고 있는 일본군의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 이 4번째 김일성도 물론 북한 김일성 주석과는 다른 인물이다. 북한 김일성 주석은 이 4번째 김일성의 부하로 이 부대의 중간 간부쯤 되는 자리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김일성 부대의 약 반수가 문맹이어서 소련은 첩보공작을 교육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약 반수는 5년간 소련장교의 집에 갇혀 있을 수밖에 없었고, 1945년 9월이 되어 비로소 소련군 점령하의 북한에 따라 들어올 수 있었다.

김일성(김좌진을 암살한 김일성)이 책임자로서 빨치산을 훈련하고 있던 오케얀스카야 야영학교에 김성주(金聖柱, 나중에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된다)가 있었다. 이 김성주는 평양 교외의 만경대 근처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방약국을 하고 있던 아버지를 따라 만주로 이주해서 한국독립단체가 세운 길림 육문중학에 들어갔으나 그곳을 그만두고 중국인 중학교로 전학했는데 중학교 때부터 사대주의 사상이 강하고 폭력을 사용해서 문제가 되었다.

그의 이름인 김성주(金聖柱)는 앞서 보천보를 습격해서 유명해진 김일성의 이름인 김성주(金成柱, 3번째 김일성)와 발음이 같고 러시아어나 로마자로 쓰면 한글과 완전히 동일했다. 때문에 베리아의 소련첩보부대는 나이 차를 무시하고 김성주(金聖柱)를 김성주(金成柱)로 바꾸어 그를 ‘김일성 장군’으로 날조하게 되었다.

소련첩보부대(88저격여단)는 김성주와 그의 동료 임춘추 등 글을 읽고 중국어에 능하며 동작이 민첩한 이들을 첩보원으로 훈련시켰다. 대일전이 일어나면 일본군의 후방인 봉천이나 안동, 신의주나 평양 등에 투하하여 첩보를 수집하려고 낙하산 강하훈련, 지도 읽는 법, 군대의 수송, 병력수의 판별법, 무전기술 등 군사첩보 교육을 시켰다.

88여단 2
오케얀스카야 야영학교(88저격여단으로 불리기도 함) 시절의 북한의 김일성 주석, 맨 앞줄 오른쪽에서 2번째 인물, 이 무렵 김일성은 소련의 군사첩보요원 교육을 받고 있었다.
소련 내무성 국경경비사령부는 김성주 등을 당 활동의 간부나 정치간부로 교육시킨 것이 아니고 순수하게 군첩보 공작원으로 훈련시킨 것이다.

스탈린은 대독일전에서 승리를 거두자 소련군 점령지역인 동유럽과 북한을 위성국가로 만들려고 간섭하고 꼭두각시를 세우는 정책을 폈다. 특히 직접 개입한 곳이 동유럽의 폴란드, 헝가리였고, 극동아시아에서는 북한이었다.

당시 폴란드의 브레스라브벨트, 헝가리의 라코시, 북한의 김일성(金聖柱) 등은 각기 소련에서 양성되고 소련군의 손으로 움직인 스탈린의 앞잡이고 괴뢰였다. 그 가운데서도 폴란드의 브레스라브벨트와 헝가리의 라코시는 한 때 자국의 공산당원이었고 불충분하나마 자국 내에서 투쟁한 경력은 갖고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金聖柱)은 한번도 조선공산당원이었던 적이 없었다. 또 조선 내부에서 근거를 두고 투쟁한 일도 없어 가장 엉터리였다.

1945년 8월 소련이 참전한 후 1주일이 지나지 않아 일본이 무조건 항복을 했기 때문에 소련은 군사첩보원으로 키운 김성주를 사용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나 소련군은 김성주에게 마요르(소좌) 계급장을 단 군복을 입히고 김동환(金東煥)이라는 공작가명을 붙여 평양에 데리고 와서 모란봉 위 아카시아 숲속에 있는 일본인의 한 가옥에 밀봉해 두고는 앞잡이로 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소련군이 평양에 와보니 민족주의자 조만식의 영향이 의외로 컸다. 또 공산주의자라고 칭하는 자들을 모아 보았더니 공산주의의 조국 소련의 이익을 제1의로 생각하기 보다는 한민족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이가 대다수였다. 소련측에서 보면 ‘우경적 민족적 편향성’을 갖고 있는지라 믿고 정권을 넘겨줄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소련은 5년간 직접 훈련시켰고 소련의 이익을 가장 우선시하는 ‘국제주의자’로 만들어진 김성주를 북한에서 소련 이익의 대변자로 변신시키기로 결정했다. 스탈린도 이를 승인했다. 이를 적극적으로 추진한 이는 소련 부수상 겸 내무상이었고 당중앙상무위원으로 스탈린과 같은 고향 출신인 베리아였다.

베리아는 자신의 내무성 기관에서 양성된 인물이기 때문에 절대로 김성주를 내세웠다. 소련 내무성이 김성주를 지지한 데 반해, 서울 주재 소련 영사였던 사브신의 보고에 따라 소련 외무성은 박헌영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당중앙위원회에서도 결정을 내리지 못한 것을 베리아의 강한 추천을 받아 스탈린이 선택해서 드디어 김성주가 조선에서 소련의 이익 대변자가되었다.

김일성 계급장
1945년 10월 14일 소련군환영 평양시 군중대회 막간에 소련군 장교들과 포즈를 취한 김일성(왼쪽부터 姜미하일소좌, 김일성, 메프레르 중좌). 메프레르 중좌(맨 오른쪽)가 김일성(가운데)이 가슴에 단 소련무공훈장을 장난치듯 만져보고 있다. 김일성은 이 무렵 앞니가 심하게 돌출돼 도드라지는 인상이었으나 뒤에 치아교정을 받은 듯하다.
김성주(金聖柱)를 김일성 장군으로 날조하는 연출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어 평양 시민 앞에 소개하는 것이 늦어졌다. 소련은 김성주를 민족해방투쟁을 한 민족적 영웅인 김일성으로 둔갑시키고 드디어 1945년 10월 14일 평양시 군중대회에서 그를 ‘김일성 장군’이라고 소개하고 소련이 이 인물을 지지한다고 밝혔다.

이 모든 공작은 치스챠코프 대장 휘하의 소련 제25군 소속 로마넹코 소장과 이그나체프 대령 등이 중심이 되어 진행했다.

김성주가 소련군을 따라 8월 24일에 평양에 들어와서부터 ‘김일성 장군’이라는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날 때까지 실로 50일이라는 준비기간이 걸렸다. 당시 소련은 조선 민중의 피나는 민족해방투쟁과 그 속에서 자란 정치적 창조력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소련의 관심과 요구는 누가 그들의 앞잡이가 될 수 있느냐였다.

그래서 스탈린은 소련의 일개 공작원에 지나지 않았던 김성주를 ‘김일성 장군’이라고 속여 아무렇지도 않게 조선 민중들에게 들이 밀 수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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