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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클리닉]일만 하던 남편의 뒤늦은 관심 불편해요

[부부클리닉]일만 하던 남편의 뒤늦은 관심 불편해요

기사승인 2015. 05. 29. 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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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직된 부부 역할 분담…가족간 감정 공유 불가능하고 상호소통 차단시켜
부부클리닉_박수룡 라온부부가족상담센터 원장
박수룡 라온부부가족상담센터 원장·정신과 전문의
한 중년 부인 K씨가 우울증인지 염려된다며 필자의 상담실을 찾았다. 그녀는 수개월 전부터 아무 것도 하기 싫고 원인 모를 눈물이 흐르며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고 했다. 아마도 2년 전, 갑상선 암으로 갑상선 절제를 받은 일 때문이거나 아니면 셋째인 막내가 올해 대학에 들어가면서 자기 할 일은 다 끝냈다는 허탈감 때문에 그런 것 같다고 했다.

중년기 여성의 우울증에는 폐경에 따른 신체적 및 심리적 변화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자녀를 모두 대학에 보내거나 막내까지 결혼을 시킨 뒤 찾아오는 우울증은 그동안의 삶을 되돌아보고 새로운 출발을 마련해야 하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최선의 치료를 위해서는 K씨의 남편이나 다른 가족의 이야기도 듣고 지금까지의 가정생활에 대해 충분히 검토하는 것이 중요했다. K씨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이러했다.

◇할 일 다 마친 것 같은 허탈감에 우울한 아내
# 2남 1녀의 맏아들과 결혼한 그녀는 남편의 수입만으로 살림이 어려워 시집살이를 자청했고 자신도 직장생활을 계속 해나갔다. 시어머니가 살림에 도움을 주지 않아 온 집안의 살림까지 도맡아야 했는데 은근히 기대했던 경제적 도움을 받기는커녕 도리어 시집의 생활비까지 부담해야 했으며, 시동생들의 결혼 때는 적잖은 돈을 대출받아 도와줘야 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남편에게 푸념도 해봤지만, 남편은 “이제 와서 뭘 어떻게 하자는 거냐”며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는 아예 서로 말문을 닫고 지냈다.

자녀가 세 명이 되자, K씨는 직장을 그만두고 다시 분가를 선택했다. 남편의 승진으로 생활을 꾸려갈 정도의 수입이 마련됐기 때문이었다. 시어머니 본인도 반대했고 시동생들 또한 누가 부모님을 돌봐드리느냐며 분가를 반대했다. 하지만 남편은 이번 K씨의 선택에 묵묵히 따라 줬다. 분가 이후 K씨가 전념한 건 자녀교육이었다. 그녀는 지금까지 시댁 식구들만을 위해 살아온 것이 억울해 자녀들을 통해서라도 보상받고 싶었다고 했다. 그리고 막내까지 대학에 들어가자, 자기가 할 일은 모두 마친 것 같아 갑자기 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단다.

# K씨 남편의 아버지는 가정에 관심이 없는 데다 경제적 능력도 없어 남편의 어머니가 궂은일을 하며 삼남매를 키웠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우등생이었던 남편은 대기업에 취업했고 이런 남편은 그 어머니에겐 기둥 같은 아들이었다. 그런데 금쪽같은 아들내미에 비해 평범한 집안 출신의 며느리인 K씨를 맞았으니, 남편의 어머니 눈에는 매사 K씨가 못마땅할 수밖에 없었다. 굳이 K씨의 말을 듣지 않더라도 남편도 그의 어머니가 K씨에게 지나친 요구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은 자녀 뒷바라지로 고생한 자신의 어머니에게 그런 식의 보상이라도 필요하겠다는 생각에서, K씨가 힘들어하는 것을 못 본 체했고 그저 K씨가 잘 견뎌주기를 바랐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직장생활에 충실해 열심히 돈을 벌어다 주는 것이라고 여긴 게 남편의 생각이었다.

◇부부간 솔직한 감정표현과 함께 경직된 역할 탈피해야
K씨의 요구로 분가해 가정은 안정된 모습을 찾았지만, 사실 남편은 K씨와 자녀에게 어떻게 다가서야 하는지를 알지 못해 집안일과 자녀 양육을 오로지 K씨에게 일임하며 지내왔다. 이제 막내까지 대학에 들어갔으니 편안한 노후만 준비하면 되는데, K씨가 암이나 우울증에 걸린 것이 그동안 고생한 것 때문이라는 생각에 모두 자신의 잘못이라며 눈물을 흘렸다.

K씨는 신혼 때부터 지금까지 남편이 회사 일에만 충실했고 자신에겐 아무 관심을 기울이지 않다가, 지금에서야 관심을 보이는 게 너무 낯설고 오히려 불편하다고 했다. 또 이제 와서 부부관계 개선은 바라지도 않는다면서, 혹여 자신에 대한 남편의 염려가 지나쳐 직장을 잃으면 자녀학자금 지원이 끊기게 될까봐 걱정했다. 남편은 직장을 잃게 되는 일은 없을 테니, 모쪼록 K씨가 회복돼 온 가족이 함께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무슨 노력이든지 기울이겠다고 다짐했다.

필자는 K씨의 우울증에 대한 약물치료와 별도로 부부치료를 진행했다. 우선 부부가 지금까지 최선을 다해준 상대방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한편, 지금까지 잘 살아온 자기 자신에게도 칭찬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다음 부부의 삶에서 달라져야 할 점, 즉 남편은 바깥일, K씨는 집안일로 지나치게 경직된 역할 분담이 잘못된 것임을 지적했다. 부부 간의 이러한 역할 분담은 부분적으로 효율적일 수 있으나, 지나치면 기쁜 일이나 힘든 경험에 대한 가족 간의 감정 공유가 불가능하고 상호 소통이 차단되기 때문에 많은 문제가 생긴다.

실제로 남편은 오래 전부터 자신이 사회적으로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정작 자신의 가정에서는 자기 자리가 없다는 느낌을 종종 경험했기 때문에 자신이 잘못 살아왔다는 것을 인정했다. 또 K씨는 그런 남편의 진심을 받아들여 집안에서 남편의 자리를 만들어주겠다는 데 동의했다.

부부가 자신의 감정을 어느 정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게 된 뒤로는 그동안의 경직된 역할에서 벗어나도록 과제를 줬다. 남편에겐 K씨와 함께 장을 보고 부엌일 또는 집안일을 거들도록 했다. 또 K씨와 자녀들에게는 남편과 함께 보러 갈 공연을 선택하게 하거나 외식을 할 식당과 메뉴를 결정하도록 했다. 이후엔 서로의 느낌을 말하고 비평 없이 듣도록 했다.

부부 모두 처음에는 다소 어색해 했지만, 점점 새로운 경험에 익숙해져 갔다. 남편은 권위를 내세우지 않고도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단히 기뻐했다. K씨는 남편과 함께 다니기도 하고 반찬 준비도 하면서 이제야 신혼생활을 제대로 하는 것 같다며 행복해 했다. K씨는 얼마 후 우울증 치료 약물도 끊을 수 있게 됐다.

살다 보면 때때로 막다른 길에 도달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자신의 노력만으로 새로운 길을 찾기 어려울 때는 전문가와의 상담을 통해 보다 안전하고 효과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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