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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때]천주교인·제주도민 충돌…‘이재수의 난’ 발생

[오늘, 그때]천주교인·제주도민 충돌…‘이재수의 난’ 발생

기사승인 2015. 05. 28.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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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수의 난
영화 ‘이재수의 난’ 캡쳐
2015년 5월 28일은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환자 2명이 추가로 발생, 국내 메르스 환자가 7명으로 늘었습니다. 보건당국은 또 첫번째 환자와 밀접 접촉자인 메르스 의심환자 1명이 지난 26일 중국으로 출국했다고 밝혔는데요. 방역 체계에 구멍이 뚫렸다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거 ‘이날’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먼저 1901년 이날 제국주의를 등에 업고 막강한 힘을 행사하던 천주교도의 행패에 맞서 이재수와 오대현이 이끈 민란으로 700여명이 숨진 이른바 ‘이재수의 난’이 일어났습니다.

1858년 제주도에 가톨릭이 전래되기 시작했고, 1899년 프랑스의 페이네 신부와 김원영 신부가 파견되면서 본격적인 전교가 이뤄졌습니다. 그 뒤 1900년 라쿨, 무세 신부가 들어오면서 교세가 확장됐는데요.

이때 강봉헌이 제주도 봉세관으로 부임하면서 온갖 잡세를 부당하게 징수했고, 이러한 일에 가톨릭교도들을 채용했습니다. 또한 교회가 부지를 매입하면서 신목, 신당을 없애는 등 제주도민의 문화를 무시하는 행위로 말미암아 도민들로부터 반감을 사고 있었는데요.

이에 대정군수 채구석과 유림 대현은 ‘상무사’라는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봉세관과 교회에 대항했습니다. 관노 이재수 등과 도민들은 일본인들로부터 입수한 무기로 무장하여 민란을 일으켰습니다.

라쿨 신부는 중국 상하이에 있던 프랑스함대에 도움을 청해 6월 1일 제주에 도착했으나 이미 제주성은 함락되었고 가톨릭교도 500여 명이 처형당한 뒤였습니다. 그 후 정부에서 파견한 강화진위대에 의해 진압, 채구석을 제외한 오대현, 강우백, 이재수 등은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나머지 주동자들은 징역에 처해졌습니다. 이 민란은 피살된 교인들의 매장지 문제, 프랑스인 재산의 손해 배상 문제 등으로 3년 뒤에야 수습됐습니다.

이재수는 관노 또는 마부였다고 하는데요. 1901년 대정군 인성리에서 주민과 천주교도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자 주민 대표로 자진 참가하여 봉세관의 토색과 천주교도의 행패를 성토하고 고발했습니다.

같은 해 5월 주민과 천주교도의 충돌로 민란이 일어나자 민군의 주장이 되어 민란을 지휘하자 이재수는 정부군에 의해 서울로 압송되어 교수형이 확정돼 처형당했습니다. 천주교측은 이 사건을 신축교난 혹은 신축교안이라 부르고, 주민들은 언제부턴가 ‘이재수의 난’으로 불렀습니다.

‘이재수의 난’은 1999년 박광수감독에 의해 이정재 주연으로 영화로 만들어졌습니다.

또 1959년 이날은 미국의 주피터 로케트에 실려 580km의 고도까지 올라갔던 원숭이 두 마리가 1930km의 우주비행을 마치고 대서양에서 살아있는 채로 구조됐습니다.

원숭이를 이용한 우주비행실험은 미국 최초의 유인 우주비행을 위한 전단계로 약 2년동안 준비했는데요. 비행에는 ‘에이블’이란 이름의 몸무게 7파운드의 벵갈 원숭이와 1파운드의 다람쥐 원숭이 ‘베이커’가 참여했습니다.

한편 1995년 이날 새벽 1시 5분 러시아 사할린 섬 북부에 강력한 지진이 발생했습니다. 주민들 대부분 잠든 새벽에 발생해 미처 피할 겨를도 없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건물더미에 깔려 더욱 큰 인명피해를 낳았습니다.

러시아 정부는 대규모의 구조대원과 장비를 실은 특별기를 모스크바에서 현지로 급파했습니다. 또 사고지역에 수용시설을 만들어 피해주민들을 긴급 소개시켰는데요. 사망자 수는 1989명으로 최종 집계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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