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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때]‘6월항쟁 도화선’ 이한열 열사 장례식 추모 행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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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때]‘6월항쟁 도화선’ 이한열 열사 장례식 추모 행렬

이재은 기자 | 기사승인 2015. 07. 09.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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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한열
2015년 7월 9일 한국은행이 올해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3.1%에서 2.8%로 하향 조정했습니다. 한은은 이날 금융통화위원회를 열고 기준금리를 연 1.50%로 동결했는데요.

이주열 한은 총재는 “수출이 부진한데다 메르스 사태와 가뭄 등의 영향으로 2분기 성장률이 예상보다 크게 낮아진 것으로 추정되기 때문”이라며 “3분기 이후에 일시적 충격의 영향이 줄면서 완만하지만 회복세를 다시 나타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과거 ‘이날’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먼저 1987년 이날 연세대 교문앞에서 시위도중 전경이 쏜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사망한 연세대 이한열군의 장례식이 거행됐습니다. 노제를 지내기 위해 연세대에서 서울시청앞까지 장례행렬이 이어지자 광장앞 인도와 차도에는 100만 인파가 모여들어 이군의 죽음을 애도했습니다. 이군의 죽음은 한 대학생의 단순한 죽음이 아니었는데요. 한국 현대사에 하나의 분수령을 이룬 ‘6월 항쟁’의 처절하고 비장한 마무리였습니다.

전두환 대통령의 5공정권 마지막 해인 1987년은 연초부터 심상치 않았습니다. 국민들은 당시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를 후보로 선철해 간접선거 방식인 이른바 체육관 선거로 연장하려는 데 거세게 저항했습니다. 게다가 2월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이른바 4·13 호헌조치는 학생들을 거리로 내몰았습니다.

학생 시위가 절정에 다다를 무렵 시민단체들은 학생들과 연합해 ‘빅종철군 고문살인 은폐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를 6월 10일 전국적으로 개최키로 했는데요. 당시 연세대 2학년생이던 이군은 이 대회의 일환으로 전날 6월 9일 연세대 교문앞에서 벌어진 시위에 참가했다가 변을 당한 것이죠.

이군 사건은 도시 중산층과 샐러리맨들을 학생시위에 가세토록 하는데 결정적인 촉매제가 됐습니다. 그때까지 학생시위대를 ‘비난하지 않는 정도’의 소극적 호응으로 대하던 중산층이 적극적으로 시위대에 가담하기 시작했고, 정권은 결국 6·29선언이란 항복문서를 쓰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또 1971년 이날 중국 황제들의 낚시터였던 베이징 댜오위타이(釣魚臺) 국빈관에 헨리 키신저 미국 대통령 국가안보보좌관이 미중관계 개선이라는 극비 임무를 갖고 방문했습니다. 1949년 이후 20여년에 걸친 미·중·간 적대관계가 해빙무드로 돌아선 것은 1970년대 들어서였는데요. 북베트남과 휴전교섭을 하고 있던 미국으로서는 베트남으로부터 명예롭게 퇴진하기 위해서는 중국이 필요했고, 중국 역시 1969년 3월 진보도에서 소련과 무력충돌은 벌인 후 미국이라는 카드를 갖고 싶어했습니다.

1971년 4월 미국 탁구대표의 중국 방문은 화해분위기를 조성하기 위한 첫 시도였고, 3개월 뒤 닉슨 미 대통령의 특별보좌관 헨리 키신저가 아시아 순방길에 올랐습니다. 키신저는 7월 3일 남베트남을 방문한 뒤 8일에는 인도를 거쳐 파키스탄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닉슨은 라디오, TV를 통해 중대발표 했습니다. “중국이 나를 초대했고 나도 세계평화를 위해 베이징을 방문하겠다”는 것이었죠. 전후 사정을 몰랐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뉴스였습니다. 북동을 핑계로 잠행한 키신저가 이날 몰래 베이징을 방문, 저우언라이와 닉슨 방중을 타진한 성과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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