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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레길 사랑과 여행] 관광지만 찾는 여행은 이제 그만! 전설 따라 떠나보는 경남 고성여행

[둘레길 사랑과 여행] 관광지만 찾는 여행은 이제 그만! 전설 따라 떠나보는 경남 고성여행

기사승인 2015. 07. 27.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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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많이 들었던 전설 ~따라 삼천리!!

일반 관광지만 찾는 여행은 이제 그만!!!

전설따라 문화유산을 찾아 떠나는 고성 전설여행

경남 고성 탈박물관에서 주관하여 고성군 일원의 전설을 들으며 떠나는

흥미진진한 여행, 즐거운 여행

여행이 끝나면 멋진 해설사가 되어 돌아오는

색다른 여행을 떠나 볼까요?

 

 

어린 학생이 무엇을 만지고 있을까요?

정말 희한하게 생겼습니다.

그 전설을 들어볼까요?

 

 

 

 

 

어린 학생이 고성 탈박물관에서

자신만의 탈을 만들어 보는 즐거운 시간을 가져봅니다.

난생 처음으로 수보도 탈을 만들어 보았답니다.

 

 

 

 

 

 

조선시대 관아 터였던 고성군청을 떠나

첫 번째 여행은 바로 고성 공룡 전통 시장내에 있는 우물터랍니다.

 

고성읍성은 약 1.4km이며 읍성 안에는 14개의 우물과 1개의 저수지가 있었지만

현재 남아있는 우물은 몇 개 되지를 않는다고 합니다.

바로 이곳은 어시정(웃장새미)!!

고성읍 사람들이 마시고 살아왔으며 지금도 물이 마르지 않아

시장안의 청소 등으로 사용하는 우물이랍니다.

 

 

 

 

 

고성 읍성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고성읍성은 길이가 3,524(1,067m), 높이 15(4~5m)정도의 성이며

우물이 14, 못이 1곳이었다고 전하나(경남문화재자료 제89)

대부분의 성벽은 훼손되어 일부 남아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랍니다.

현재는 할머니가 살고 계시나 고성군청에서 관리하고 있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 성밑을 파보면 옛날 성의 형태가 나온다고 하네요.

 

 

 

 

 

 

고성 성내리 지도

성안에 있는 마을로 옛날 읍성이 있었던 자리인 것 같네요.

 

 

 

 

 

청혜비(淸惠碑)라고 새겨져

그 당시의 성의 경계를 표시하는 비석이

마을 한편에 담으로 사용되어 지고 있답니다.

 

옥골에서 들리는 소리

성내리 서내마을은 옛날 이곳에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이 있어

옥골이라 불렀다고 전해집니다.

이 부근의 앞은 바다이며 유배지인 대섬이 있었고

당시 감옥에서 죽은 사람들은 이 골짜기에 묻지도 않고

그냥 마구 버려 야수의 밥이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지금은 집들이 들어차 흔적을 찾을 수 없으나

비가 오거나 어둑한 밤이 되면

빈 공터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함을 지르며 아우성을 치는 소리가 났다고 하며

아마도 감옥에서 죽은 사람들의 원혼들의

소리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고 전해집니다.

옥골이 있는 서내마을에는 옥천정이라는 우물이 하나있었는데

지금은 폐정이 되었지만

30년 전만해도 이 우물은 인근 주민들의 주요 식수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정유재란때 일본군이 고성 바로 팀부분에

왜성을 쌓았던 흔적들이 남아있는 곳이랍니다.

 

 

 

 

 

 

죽섬, 죽도, 대섬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옛날엔 바다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퇴적층이 이렇게 남아있답니다.

 

 

 

 

 

정절공 호은선생 유적지 비가 있는 죽도랍니다.

고성 허씨 시조가 되는 사람이 있던 곳으로

유적비가 있는 앞으로는 바다 절벽이었던 곳이랍니다.

옛날 고려 말에는 홍건적을 토벌한 공을 세운 호은 허기(許麒)

신돈을 참할 것을 상소한 석탁을 변호하자

공민왕의 노여움을 사 이곳 죽도에 유배되었다고 전해지네요.

유배에서 풀려난 뒤에 태조 이성계가 불렀으나

끝내 정사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고려가 망하고

조선을 건국한 후 다시 이용하려 했으나

두임금을 섬길 수 없다하여 세상을 등지고 고성읍

죽도에서 은거하였다고 합니다.

그 뒤에 마암면 장산에 터를 잡고 살아

김해 허씨 고성지방의 중시조가 되었는데

이때 장산 숲을 조성하였다고 전해집니다.

 

 

 

 

 

고성군 대가면 척정리 1052번지에 우뚝 서있는 은행나무

수령이 800여년으로 둘레가 자그마치 9.4m

 

 

 

 

 

800여년이 된 은행나무의 전설을 한번 들어볼까요?

옛날 옛날 이 마을에 아주 잘생긴 3대독자 도령이

이씨 성을 가진 처자와 결혼을 하였답니다.

이씨 부인은 심성이 곱고 웃어른을 잘 공경하고 품행이 단정하여

시어머니와 동네 어른들에게 칭찬이 끊일 줄 몰랐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며느리가 임신 했다는 소식을 들은

시어머니는 덩실덩실 춤을 추며 좋아라 했답니다.

얼마 지나지 않은 이씨 부인은 예쁜 딸을 낳았답니다.

그런데 이씨의 시어머니는 아들이 아니라는 이유로

얼마나 구박을 하던지 매일 매일 눈물로 세월을 보내고

산후 조리도 못하고 나가 일을 시키고 했답니다.

아픈 몸을 이끌고 저녁까지 일만 했던 며느리 해가 질 무렵 집으로 돌아와

시어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아기에게 젖을 먹이려고 방으로 들어섰는데

아기에게 이불을 덮어 두어 순간 이상하다는 생각으로

아기를 보니 아기의 몸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어

대성통곡을 하고 집 근처에 있는 은행나무를 찾아가

딸을 낳은 죄인이고 또 딸은 나으면 또 이런 불행이 닥칠 것 같아

지극정성으로 빌고 또 빌었답니다.

산신령이 이씨 부인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주었는지

 옥동자를 한명 나아 고약한 시어머니는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이씨 부인이 젖이 나오지 않아 또 시름에 빠져있고

시어머니는 이씨 부인을 또 괴롭히기 시작했지요.

이씨 부인이 산후조리를 하지 못해 젖이 나오지 않았던 것이랍니다.

고약한 시어머니는 이씨 부인에게 아들을 보여주지도 않고

젖동냥을 하면서 키우고 있었답니다.

이씨 부인은 그길로 은행나무를 찾아가

그토록 아들을 원했는데 아들을 점지해주셨으면

젖까지 줄 것이지 젖을 나오지 않게 했냐고

대성통곡을 하며 이씨 부인은 그만 은행나무에 목을 매고 죽었답니다.

그 순간 은행나무는

심하게 흔들리고 나뭇가지가 쳐지고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여 한바탕 난리를 쳤답니다.

그 다음날 아침 간밤에 언제 그랬는가 싶게 아주 맑은 아침이 밝았답니다.

간밤에 시어머니의 꿈에 며느리가 나타나

 뒷산 은행나무에 가면 매달린 꼭지를 자르면 젖이 나올꺼라면서

아들을 잘 키워달라고 해서

시어머니는 바로 은행나무로 달려가 기둥을 잘아보니

우유가 나와 아들을 키웠다는 슬픈 전설이 서려있는 은행나무랍니다.

이것을 바로 유주(乳柱)라고 한답니다.

그 이후 젖이 잘 나오지 않은 사람들이 찾아와 지극정성으로 빌면

젖이 잘 나온다는 얘기도 전해 내려오고 있답니다.

 

 

 

 

 

유주가 많이 달려있는 은행나무

참 신기하기도 하네요.

 

 

 

 

멀리서 보니 전설이 있는 은행나무가

얼마나 큰지 짐작이 갑니다.

이 은행나무 뒤로 옛날에 행은정이 있었던 곳을 표시하는 비석이 하나 서있기도 합니다.

 

 

 

 

 

효자 이평 비

오른쪽은 원래의 효자 이평 비, 왼쪽은 새로 만든 효자 이평 비

호랑이를 감동시킨 효자 이평에 대한 전설을 알아볼까요?

옛날 이 동네에 이평(1803~1874)이 살았답니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부모님도 이제 연로하여

그만 저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답니다.

이평은 부모님의 묘에 움막을 짓고 3년 동안 시묘살이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자식이 탈상을 할 때까지 3년 동안 묘소 근처에서

 움집을 짓고 지내면서 묘를 돌보며 제사를 올리는 일)하고

 지극정성 묘를 돌보며 묘 주변에 벽을 쌓기 위해

 주변 산골짝에서 돌을 가져와서 벽을 쌓았답니다.

이평은 한 골짝에서 하나의 돌만 가져와 쌓았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평의 지극정성에 감동한 호랑이가

 돌을 가져오는 것을 도와 그 벽을 빨리 쌓을 수 있었고

시묘살이를 잘 할 수 있도록 호랑이가 도와주었답니다.

이런 시묘살이의 소문이

 고성읍 서당친구들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답니다.

짓궂은 서당친구들은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을 해 보려고

 호롱불을 들고 밤에 가보니 움막집에 이평이 없었다고 하네요.

서당 친구들은 그럼 그렇지 이평의 시묘살이가 거짓말이지 하면서

 그만 불을 지르고 가버렸다고 하네요.

움막에 없었던 이평은 잠도 자지 않고 돌을 주워러 갔던 것이지요.

움막이 없으니 이평은 그냥 맨땅에서 시묘살이를 계속 했답니다.

그런 어느 날 꿈에 호랑이가 나타나

 원문재(고성에서 통영가는곳 원문고개) 어느 웅덩이에

호랑이가 빠져 구해달라는 꿈을 꾸어

 바로 잠에서 깨어 달려가 보니

 마을 사람들이 호랑이를 잡으려고 함정을 파둔 곳에

그만 호랑이가 빠졌답니다.

마을 사람들이 호랑이를 죽이려고 하자

 이평은 제발 저 호랑이는 자기를 이렇게 도와준 호랑이라면서

 절대 죽여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사정을 했답니다.

마을사람들은 그 말을 믿을 수 없다면서 죽이자! 라고 해서

 이평은 그 함정 속에 뛰어 들었답니다.

그 순간 호랑이는 이평의 품에 안기며

가만히 있자 마을사람들은 이평의 말을 믿고

 호랑이를 풀어주었다고 합니다.

이런 소문이 임금님 귀에 까지 들어가

 효자시효를 내리고 비를 세웠다고 전해집니다.

호랑이를 감동시킨 효자 이평의 이야기가 서려있는 곳이랍니다.

 

 

 

 

 

 

고성 양화리 법천사지 가는 길

 

 

 

 

 

산으로 올라가는 입구 이곳에

원래 부도가 몇 개 있었는데 한곳으로 옮겨 두었다고 합니다.

 

 

 

 

 

 

 

승탑 7기와 승탑비 1기로 이루어진 법천사 부도군

지금은 옥천사가 제일 큰 사찰이지만

법천사는 고려, 조선 초기에 고성군에서 제일 큰 사찰로 추정되어 진답니다.

 

이렇게 큰 법천사가 흔적도 없고 자료도 내려오지 않는 것은 왜일까요?

말로만 전해 내려오는 설로 법천사는

엄청난 신도들이 있어 많은 돈을 벌게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돈을 벌면 주변의 땅을 사고해서 절의 규모는 점점 커져 갔답니다.

그런데 법천사 스님은 혼자 배불리며 호의호식을 하면서

지내오던차 동학때 법천사를 태워던 머슴들이

땅을 한 평씩 한 평씩 가져가고 입을 다물면서 쉬쉬 해서

그 후 아무도 알수 없었다고 전해져 내려옵니다.

결국 과한 욕심으로 그렇게 큰 법천사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게 아닌가 생각 듭니다.

앞에 나왔던 해설사가 열심히 해설을 하고 있었던 자리에 원래 부도가 두 개가 있었으나

이곳으로 옮겨 부도군을 형성하고 있답니다.

과한 욕심으로 결국 패망에 이르렀다는 교훈을 주는 법천사의 전설이랍니다.

 

 

 

 

 

현재 고성박물관에 있는 계붕화상비

계붕화상비와 법천사는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계붕화상(1707~1787) 거제에서 태어나 고성 법성정사에 입적을 하였답니다.

부도는 정조 13(1789) 문인. 상좌 등이 세웠고 비는 입적한지 16년 뒤인 순조3(1803)

전 사간원 정언 이병열이 지은 글을 세겨 세웠다.

반쯤 묻힌 형태로 법천사지에서 발견되어 고성 박물관에 전시를 하고 있답니다.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 1호

석마(石馬)

 

 

 

 

 

 

고성군 마암면 석마리에 있는 돌로 만든 말 석마상이랍니다.

옛날 호랑이는 200km까지 자기 영역을 갖고

동물의 왕으로 군림하였다고 합니다.

옥천사근처에는 1945년까지 호랑이가 나타나

마을의 말, , 사람을 헤치며 피해를 입혔다고 전해집니다.

마을 사람들은 호랑이 때문에

근심걱정이 사라질 날이 없었답니다.

그런 어느 날 이 마을에 노인 한분이 지나가면서

이 마을 사람들의 걱정을 듣고

돌로 말을 두 마리 만들어 마을 입구에 세우라고 했답니다.

길이 2.1m, 높이 45cm정도의 암, 수 각각 한 마리씩 만들어 두었더니

더 이상 호랑이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석마리 석마의 전설이랍니다.

 

지루하고 따분한 문화유산 해설은 이제 그만!!

흥미진진한 전설이 내려오는 고성전설여행 어떤가요?

다음 편을 기대해주세요

    



작성자: 수보
출처 : http://blog.daum.net/tkfkdaq/5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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