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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 실제활동, 중국공산당 동북항일연군의 진실

김일성 실제활동, 중국공산당 동북항일연군의 진실

기사승인 2015. 10. 0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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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후반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원회 산하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2방면군 대원들, 북한은 이 동북항일연군의 활동을 김일성이 지휘하는 조선인민혁명군의 항일무장투쟁으로 위조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인민혁명군은 존재치 않은 군대다.
광복 70년, 창간 10주년 특별기획
종북의 뿌리 ‘김일성 바로 알기’ 18편

1932년 스무살 청년 김일성은 첫 무장투쟁으로 무송에서 우리 독립군 고동뢰(高東雷) 소대장 일행을 참살하고 자취를 감춘 뒤, 갈 곳이 마땅치 않았다. 그는 이후 안도현(安圖縣)에 있는 중국인 오의성(吳義成) 부대로 갔다.

오의성은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200명 가량의 병력을 가지고 있었다. 김일성은 이 오의성의 당번병으로 들어갔다. 오의성 부대는 1933년에는 600명으로 병력이 늘고 왕청현(汪淸)縣)을 근거지로 하다가 1934년 6월 28일에는 타 항일부대와 연합하여 왕청현에 있는 만주국 군대를 공격한 일이 있다.

이 전투를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 오의성 부대가 김일성의 지휘 아래 있었던 것으로 조작하고 있다. 일제 군대의 공격 때문에 오의성 부대는 1936년에는 동녕현(東寧縣) 쪽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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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서 연해주로 넘어간 동북항일연군교도려 출신 최용건, 김책, 김일, 김일성, 강건(왼쪽부터).
◇중국인 오의성 부대 당번병으로 활동

이 해 봄에 일제의 가중하는 포위공격을 견디려고 중국 공산당 만주성위 산하 동북항일연군 제5군과 제2군 제2사 및 제3사와 오의성 부대는 서로 협의하여 연합전선을 폈다. 이 때에 비로소 오의성 부대원이었던 김일성은 공산주의 부대인 동북항일연군과 접촉하게 되었다. 특히 제2군 제2사와 제3사에는 한인들이 많아 그에게는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이 때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 제2군 제3사(사장 金日成, 3번째 김일성, 보천보 전투의 주역, 1937년 11월 13일 일본군에 사살됨)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후 제3사는 제 1로군 제2군 제6사로 개칭되면서 남하하여 압록강 대안인 무송현 장백현으로 이동했다. 무송현에는 오의성 부대의 한 지대인 이옥진(李玉珍) 부대가 200명 가량의 병력을 가지고 주둔해 있었다.

또 악단장(岳團長) 부대라고 하는 비공산계 항일부대도 있었다. 제 6사장 김일성(북한 김일성과는 다른 3번째 김일성)은 이들 부대와 연합하여 1936년 8월 17일에 무송현성을 포위 습격하여 일제를 놀라게 한 일이 있다.

북한의 김일성은 무송에서 살았던 사람으로 이 일대의 지리에 밝았으므로 이 전투 때 제 6사장 김일성(3번째 김일성) 부대에 가담했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에서는 이 무송현성 전투를 북한의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을 데리고 타 항일부대와 연합하여 한 전투로 조작하고 있다.

북한의 김일성이 제 6사장 김일성 부대의 대원이었음은 다음과 같은 일로 확인되었다. 만주 안도현의 치안대장으로 이도선(李道善)이란 한인 간부가 있었다. 이도선은 동북항일연군 토벌에 뛰어난 솜씨를 발휘했던 사람이다.


일제시기 빨치산 군복차림의 북한 김일성 부부
일제시기 빨치산 군복차림의 북한 김일성 부부:북한 노동신문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지난 8월 1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할아버지 김일성 관련 특집 사진을 게재했다. 사진은 항일빨치산 차림을 한 김일성과 김정숙 부부로 사실상 혼인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사진=연합뉴스
◇생포된 김일성의 막내동생 김영주

1937년 봄에 이도선이 제6사장 김일성 부대 토벌에 나섰다가 한 소년 대원을 붙잡아 왔다. 이 소년은 북한 김일성의 막내 동생 김영주(金英柱)였다. 15살밖에 안된 김영주는 1932년에 어머니를 잃고 둘째형 철주(哲柱)와 둘이서 살다가 철주마저 1935년에 죽자 의지할 데가 없어 큰형(북한의 김일성)을 찾아 제 6사장 김일성 부대의 소년대원으로 종군하고 있었다.

마침 이도선의 형 이도일(李道日)이 무송에서 살 때 김일성의 아버지인 김형직과 친구지간이었기에 고아인 김영주를 불쌍히 여겨 보호했다고 한다.

이렇듯 북한의 김일성은 동북항일연군의 제6사장 김일성(3번째 김일성) 부대의 대원이 되었다. 그는 이 시기 김일성(金一星)으로 통명하고 있었다. 이런 동북항일연군 활동을 북한은 김일성이 조선인민혁명군을 창설해서 10만여회 전투를 벌여 우리나라를 해방시켰다고 선전하고 있다.

1932년 4월부터 1945년까지 10만여회 전투를 벌였다고 하는 것이 북한의 선전이다. 그렇지만 1940년 여름부터 1945년까지는 지하공작기였으므로 무장활동 기간은 북한의 주장대로 하더라도 32년부터 40년까지 8년간이다. 이 8년간에 10만여회라고 하면 하루도 쉬지 않고 하루 평균 34회의 전투를 한 셈이 된다. 이를 시간으로 따지면 매일 밤잠도 자지 않고 2시간에 3번씩 전투를 한 것이 된다. 이런 거짓말을 누가 믿겠는가.


1956년 '보천보 전적지'를 둘러보는 김일성
1956년 ‘보천보 전적지’를 둘러보는 김일성; 북한 노동신문은 광복 70주년을 맞아 지난 8월 1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할아버지 김일성 관련 특집 사진을 게재했다. 사진은 김일성이 46세이던 1958년 보천보혁명전적지를 둘러보는 모습이다. 보천보전적지는 일제시기이던 1937년 6월 4일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하던 김일성이 함경남도 갑산군 보천보로 잠입해 일제와 전투를 벌인 장소라고 북한은 선전하고 있다./사진=연합뉴스
◇모택동의 경력 모방해 10만여회 전투 벌였다고 날조

그렇지만 이 10만여회라는 숫자는 그냥 나온게 아니다. 북한의 김일성 경력 창조팀은 소년 김일성의 경력은 레닌을, 그리고 항일투쟁 시기는 모택동을 모방했다. 이 10만여회도 모택동을 모방한 것이다.

모택동은 1945년 4월 24일에 중국 연안(延安)에서 중국공산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했다. 121만 당원을 대표하여 544명의 정대표와 208명의 후보대표가 참석한 이 자리에서 중국공산당의 중국인민해방군은 1937년 9월부터 1945년 3월까지 크고 작은 11만5천여회의 전투를 했다고 발표됐다.

1937년 9월부터라는 말은 1937년 7월에 중일전쟁이 일어나면서부터라는 뜻이다. 모택동의 군대가 8년간 11만5천여회의 전투를 했다면 북한 김일성의 조선인민혁명군은 정규군이 아니라 유격대였으므로 중국인민해방군보다 비교가 안될 정도로 규모가 작은 것이여야 한다.

그 작은 것이 같은 8년 동안에 10만여회라는 것이다. 북한의 선전대로라면 김일성은 모택동보다 몇갑절이나 더한 무장혁명가가 되는 셈이다.

이처럼 북한의 김일성이 실제로 활동했던 중국공산당 만주성위 산하 동북항일연군은 1940년 무렵에 거의 괴멸 상태에 들어간다. 일제는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에 대한 최후토벌작전을 1939년 10월부터 1941년 2월까지 진행한다. 동북항일연군의 숫자는 불과 2000명 정도였으나 소부대로 나뉘어 대낮도 한밤 같은 험한 산속 밀림을 쏘다니기 때문에 일본의 만주군은 토벌에 애를 먹었다.


혜산시에 건립된 김일성·김정일 부자 동상
혜산시에 건립된 김일성·김정일 부자 동상:지난 9월 25일 북한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동상을 혜산시에 건립됐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사진=연합뉴스
◇김일성, 1940년 연말에 처 김정숙과 함께 소련으로 탈출

그래도 1940년에 들어가서는 동북항일연군은 최후 괴멸 상태에 들어갔다. 총사령 양정우(楊靖宇)를 비롯하여 숱한 간부가 전사하고 체포되거나 투항한 자도 부지기수였다. 1940년 12월엔 동북항일연군 제2방면군장 김일성(4번째 김일성, 북한의 김일성과 동명이인)은 부하 20명을 데리고 소련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이 무렵 북한의 김일성과 그의 처 김정숙도 소련으로 도주했다.

때문에 1941년 2월에 이르러 중공당 만주성위 산하 동북항일연군은 만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소련으로 도주한 병력은 모두 300명 가량이었고 이 가운데 한인은 100명 정도였다. 소련은 우수리강을 사이에 두고 동북항일연군에 대한 원조를 아끼지 않았고 이들 입국자들을 수용하여 재교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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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중반 이후 동북항일연군에 소속돼 활동하던 조선인 유격대원들은 1940년 역량보존을 위해 연해주 지역으로 넘어갔다. 1942년 8월 동북항일연군교도려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던 동북항일연군의 단체사진이다. ...
◇김일성, 연해주에서 소련 첩보요원 훈련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계 대원들은 블라디보스톡 근처의 오케얀스카야의 야영학교에 수용되었으므로 북한의 김일성도 이곳에 있었을 것이다. 이들 중 특별히 선발된 자들은 따로 소련군 장교의 지도 아래 무전 기술, 낙하산 훈련 등 첩보요원으로서 특수훈련을 받았다. 일본과의 전쟁이 시작됐을 때 후방교란요원으로서의 교육이었다.

북한의 김일성은 1945년 8.15 직후에 평양에 나타났을 때 이런 교육을 받았다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소련은 또 동북항일연군 대원들을 정보 수집차 무장 공작원으로 만주의 그들 전 연고지로 침투시키기도 했다. 이러한 공작들은 소련 내무성 연해주지구 경비대의 통제 아래 진행되었을 것이다.

북한의 김일성은 머리가 빠르고 행동이 민첩한 사람이었으므로 첩보 공작차 만주로 보내졌을 가능성이 충분한데 다른 사람들에 대한 기록은 있어도 김일성에 관한 기록은 아직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1945년에 일본이 항복하자 소련군의 배를 타고 북한으로 파견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가 소련장교들로부터 배운 특무공작의 기술은 일본을 패망시키는데 쓰이지 않고 거꾸로 북한 인민을 정방위통제체제로 묶는데 사용되었다.

소련이 북한으로 파견한 한인들은 크게 나누어 2갈래다. 하나는 북한의 김일성과 같은 중국 공산당의 동북항일연군 출신으로 최용건, 김책, 최현 등이 이에 속했다. 그 구체적인 숫자를 정확하게 알려주는 자료는 없으나 소련으로 넘어간 동북항일연군의 한인 100여명 가운데 해방 때 돌아온 이는 60, 70명 정도였다.


북 김일성·김정일 '업적' 중앙연구토론회 열어
북 김일성·김정일 ‘업적’ 중앙연구토론회: 김일성 주석, 김정일 국방위원장,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당 건설 업적과 전통을 연구 체득하는 중앙토론회가 지난 10월 1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진행됐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일 보도했다. /사진=연합뉴스
◇1945년 블라디보스톡에서 배를 타고 원산을 통해 평양 도착

소련은 이들 중 30여명에게는 장교계급장을 붙여서 데리고 왔다. 이들은 블라디보스톡에서 기차로 만주의 목단강까지 가서 거기서 또 기차로 회령쪽으로 들어오려다가 노송령 터널을 일본군이 폭파해 막혔기 때문에 다시 블라디보스톡으로 되돌아가서 배를 타고 원산을 거쳐 1945년 9월 중순에 평양에 도착했다.

이들과 성분이 또다른 한인들은 소련 태생의 2세들이었다. 허가이, 박창옥, 박의원, 기석복 남일 등이 이에 속했다. 이들은 소련에서 학교 교육을 받았으며 소련공산당원으로 성장했던 사람들이다.

하지만 소련군 당국은 김일성에게 소련에 가 있었던 사실을 감추게 했다. 때문에 김일성은 1940년부터 1945년까지 기간을 만주와 국경지대의 국내에서 지하공작을 지휘한 것으로 꾸몄다. 이유는 물론 투쟁경력을 높이려는 것도 있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소련의 앞잡이가 아니란 것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해방 당시 북한에 위성정권을 세우려고 했던 소련은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세력을 주축으로 삼아야 했다. 이 무렵 소련이 가장 신임할 수 있는 세력은 자신들이 지원하고 보호해온 동북항일연군 출신들 밖에 없었다. 그래서 소련이 낙점한 인물이 김일성이었다.

결국 김일성의 유일최고의 무장혁명가였다는 북한의 선전은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한 거짓말임을 알 수 있다. 북한에서는 이처럼 엄청난 거짓말이 우리 민족의 항일투쟁의 역사의 전부가 되어있다. 이 거짓말 역사는 북한에서뿐만 아니라 남한의 역사학계에서도 상당수가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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