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박영주의 그때그시절 IT] ④ ‘나왔다 하면 열풍’ 아이폰 국내 출시 늦었던 이유가...

[박영주의 그때그시절 IT] ④ ‘나왔다 하면 열풍’ 아이폰 국내 출시 늦었던 이유가...

기사승인 2015. 10. 27. 10:48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나올 때마다 한바탕 소란을 떤다. 아이폰 개통행사 얘기다. 지난 23일 아이폰6S, 아이폰6S플러스 개통 현장. /사진=KT
나올 때마다 한바탕 소란을 떱니다. '혁신은 없다'지만, 그래서 '잘 안 팔릴 것'이라고 하지만 언제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혁신적이고' '많이 팔립니다'. 아이폰 얘깁니다. 애플이 2차 출시국에 한국을 포함시킨 덕에 이번에도 뒤늦게 지난 23일부터 국내에서도 '아이폰6s'와 '아이폰6s 플러스'를 손에 쥘 수 있게 됐습니다. 1호 개통자를 앞세운 이통3사의 개통행사로 당일 하루종일 북적거리기도 했죠. '아이폰 베테랑'을 자부하는 한 통신사는 '국내 최초 1호 부부 가입자'를 내세우기도 했습니다. 
첫 주말의 아이폰 판매 실적도 관심사항이었습니다. 26일 보도에 따르면 '북적였지만, 대란 수준은 아니었다'로 귀결됩니다. 주말 번호이동 건수가 평소의 2배 가까이 늘었지만, 특히 게릴라식 치고 빠지는 '보조금 폭탄' 사례는 발견되지 않았답니다.(물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닙니다.^^;;) 100만원이 넘는 출고가 책정에 대한 소비자 불만도 적지 않으니, 아이폰7으로 자위하는 구매대기자도 그만큼 많은 형국입니다.

국내 첫 도입된 아이폰 '아이폰3GS'.
아이폰이 국내 들어온 건 잘 아시다시피 2009년 11월 28일, '총대를 멘' KT에 의해서였습니다. 앞서 아이폰(오리지널)이 처음 출시된 게 2007년 6월 29일이었고(아이폰 처음 발표는 2007년 1월), 이어 3세대(3G)를 지원하는 아이폰3G가 2008년 7월 11일, 후속 아이폰3GS('S'는 'Speed'의 약자라네요)가 2009년 6월 29일 세상에 나왔으니, 우리나라는 아이폰 첫 출시로부터 2년 넘게 이를 접해보지 못한 셈이지요.(참고로 대한민국 1호 아이폰 개통자는 이 당시 서울 방배동 거주 허진석씨. 약 27시간을 기다려 아이폰 1호 영예를 안았다는 이 분, 지금 어디서 뭐하실까…)

'국내 첫 아이폰 가입자' 영예를 가져간 이 분(사진 왼쪽). 뭐 하시나, 지금은. /사진=kt
아이폰은 '한번도' 휴대전화를 만들어보지 못한 애플이 내놓은 스마트폰이었습니다. MP3플레이어 '아이팟'에 통신모듈을 넣어 '가장 편리한 스마트폰'을 세상에 선보였습니다. 초기 모델의 시행착오도 적지 않았지만, '와이파이 혁명' '앱스토어 구축' '운영체제(iOS) 탑재' 등에 더해 배터리 일체형의 '애플스러운' 유려한 디자인은 큰 호응을 이끌어냈습니다.(물론 아이폰3GS에 이르러 아이폰 대중화가 실현됩니다. 아이폰 오리지널의 가격은 8GB 모델이 무려 599달러였다는군요. ㅠ)

휴대전화와 MP3플레이 등의 '결합'을 예견한 스티브 잡스의 첫 휴대전화는 모토로라와 손잡고 2005년 내놓은 뮤직폰‘락커(ROKR)’였다. 그러나 평범한 디자인, 어려운 사용법, 저장 음악의 제한 등으로 실패! ('직접 만들자'고 다짐한 잡스가 이동통신사 싱귤러(Cingular)를 찾아가 자체 개발폰의 독점제공을 제안한 비밀회동을 가진 건 유명하죠)

애플은 모토로라와 함께 'ROKR'를 출시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했다. 사진은 모토로라의 'ROKR E2'. 2005년말 출시됐다.
아이폰이 국내 출시되기 전, 우리도 스마트폰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윈도우 모바일(5.0)을 탑재한 3G 스마트폰 '울트라메시징(SCH-M620, SPH-M6200. 일명 ‘블랙잭’)’이 국내 출시된 게 2007년 7월 25일입니다. 당시 스마트폰 대명사였던 '블랙베리'처럼 쿼티(QWERTY) 자판을 국내 처음 채택했고, 제품 측면에 '휠(wheel)키'를 탑재해 손쉬운 메뉴검색을 지원했습니다. 와이파이를 통한 인터넷 검색도 '푸시 메일' 등과 함께 자랑거리였습니다.(2008년 국내 스마트폰 시장에서 삼성전자 스마트폰 점유율은 약 50%에 달했죠) 

삼성이 2007년 내놓은 일명 '블랙잭'으로 불린 '울트라메시징'폰. 매끈한 몸매와 튼실한 외관을 갖췄지만, 상대적으로 '덜' 스마트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사진=삼성전자
당시 해외에서는 '스마트폰' 카테고리가 기지개를 켜던 시절이었습니다. 단순 음성통화에서 나아가 데이터를 이용하려는 수요를 끌어안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업무 특성상 이메일 사용이 많았던 미국의 경우 쿼티 자판을 통한 장문의 이메일 작성이 가능했던 RIM(Research In Motion)사의 블랙베리 인기는 대단했습니다.(지금은 완전 쪼그라들었지만, 한때 '오바마폰'으로도 불렸던 블랙베리 첫 출시는 1999년이었습니다. 탁월한 보안성으로 스마트폰의 대명사이기도 했죠. 격세지감)

블랙베리. 한때 스마트폰계를 풍미했다. 오바마가 사랑했던 폰. 최근 첫 안드로이드 탑재 스마트폰 프리브(Priv)를 내달 6일 출시한다고 해 잠깐 관심. 그러나 큰 기대는 않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회자되는 '최초의 스마트폰'은 무엇일까요? 한 자료에 따르면 IBM의 사이먼(Simon)'이랍니다. 휴대전화 기능에 주소록과 시간, 메모장, 계산기, 게임 기능 등을 포함시켰다네요)

그렇다면 왜 KT였을까요? 당시 1위 사업자 SK텔레콤에 밀려 만년 2위 사업자에 그쳤던 KT의 '결단' 때문이라는 게 유력합니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으로 '만년 2위'가 성에 차지 않았던 이석채 당시 KT 회장의 결단도 한 몫 했으리란 판단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매번 다음달로 출시가 연기되면서 '담달폰'이란 오명도 이때 등장했습니다.(그래도 국내 아이폰 출시 역사와 함께 한다는 점에서 KT는 '아이폰 베테랑'이란 자찬도 가능케 됐습니다. 물론 여전히 '2위 통신사'를 못 벗어나고 있긴 하지만요.)

그렇다면 왜 아이폰을 국내 도입한 게 ‘하필’ KT였을까요? 당연 1위 사업자인 SK텔레콤은 아이폰에 별 관심이 없었을까요? 이들 이통사들이 해외에서 부는 ‘아이폰 열풍’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안정화를 이룬 아이폰3GS는 말 그대로 대박을 쳤으니까요.(출시된 지 3일만에 100만대 판매 등등) 뭐든 도박은 2위가 합니다.(물론 도박 못하는 2위도 있긴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늘 2위입니다. 누구누구 얘깁니다) 미국에서도 1등 버라이즌이 아니었고 2위 AT&T(당시 싱귤러)였으며, 일본도 1위 NTT도코모가 아니라 소프트뱅크가 아이폰을 덜컥 물었습니다. 한국도 그런 이유입니다. KT가 1위 SK텔레콤보다 더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래서 한국 내 존재하는 여러 진입장벽 해소를 위해 때로는 여론(언론)을 동원해가며 정부를 압박하기도 했습니다.

논란이 된 한국일보 '특종'기사. 곧 삭제됐지만, 그 여파는 두고두고 컸다. /사진=한국일보 당시 1면 캡처.
이 과정에서 한국일보의 당시 특종이 등장합니다. 'SKT 작년 아이폰 도입 유보 이재용의 '막후요청' 있었다'는 기사가 2010년 1월 6일자 1면에 단독 보도됐습니다. 상당한 파장을 일으켰는데요. 이 기사는 그러나 바로 삭제가 돼 논란을 증폭시켰습니다.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사장이 2009년 말 최태원 SK그룹 회장에게 아이폰 도입을 유보해 줄 것을 요청했고, 실제 SK텔레콤이 최 회장 지시를 받고 도입을 보류했다'는 게 당시 보도 내용이었습니다. 이후 SK텔레콤은 KT보다 1년 5개월 여 늦은 2011년 3월에서야 비로소 아이폰(4)을 출시하게 됩니다.(한 나라에서 복수 통신사가 아이폰을 공급한 게 이때가 처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후 LG유플러스도 2014년 10월 VoLTE를 지원하는 아이폰6/6+를 시작으로 아이폰을 출시합니다)

그렇다면 아이폰의 국내 출시는 왜 늦어졌던 것일까요? 지금도 여러가지 요인들이 그 원인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어느 하나가 아니라 모두’라는 게 맞을 것입니다. 당시엔 국내 무선인터넷 플랫폼이랄 수 있는 ‘위피(WIPI;Wireless Internet Platform for Interoperability)’라는 게 있었습니다. 모든 휴대폰에 이를 집어넣어 플랫폼 단일화를 통한 효율을 꾀하자는 거였죠. 중복이 없으니 콘텐츠 개발도 단일화해 이통3사에 모두 공급할 수 있다는 취지였습니다. 당시 퀄컴의 브루(BREW)나 썬마이크로시스템즈의 J2ME 종속을 탈피하자는 것도 도입 이유입니다. 위피는 그러나 점차 폐쇄적인 형태로 운영되면서 특히 이용자들로부터 강한 반발에 부딪힙니다. 호환성 불발은 물론, 단말(특히 외산) 경쟁을 가로막은 요인으로 변질됐기 때문입니다.(어찌보면 요즘 ‘액티브X’와 같다고나 할까. 이용자는 다 싫다는 데 이게 꼭 필요한 일부에 의해 여전히 목숨을 부지하는) 결국 2009년 4월 1일부로 ‘위피 only’ 정책은 폐지됩니다.  

위피.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토종 플랫폼. 시대의 소명을 다하면 '제 때' 스러져야 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준 대표 사례. 액티브x 보고 있나. 사진은 2003년 4월 29일 있었던 위피 1.1 발표회 모습.
국내 이통사와 단말 제조사들도 반대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이통사 경우 콘텐츠 제작자(CP)들에게 나워주는 애플(앱스토어)의 파격적인 수수료(제작자 몫 70%. 이전 5%?)가 눈엣가시였다는 분석입니다. 제조사야 뭐, 삼성 경우처럼 적지 않은 타격을 우려했기 때문이었구요. 실제 당시 ‘스마트폰’ 블랙잭을 쓰다 아이폰을 처음 접했을 때 느낌은 너무 강렬했습니다. 팡팡 터지는 인터넷, 속 시원한 자판, 매끄러운 움직임, 손에 착 붙는 유려한 그립감 등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이 당시, ‘옴니아 대란’도 벌어졌습니다. 아이폰 도입 직전 대량 공급된 옴니아폰에 실망한 이용자들의 집단 반발이 일어난 건데요. 많이 팔았는데, 막상 아이폰보다 못하다는 사용자 판단에 따른 것입니다. 지금 흔한 ‘기레기’처럼 그때는 ‘옴레기’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퀄컴의 무선인터넷 플랫폼인 브루(BREW) 탑재 삼성전자 스마트폰. 2002년 KTF(현 KT)에 공급됐다.
여기에 더해 A-GPS를 이용하는 아이폰 특성상 국내 위치정보법 적용 여부도 걸림돌이 됐습니다. 애플이 직접 국내 위치정보사업자로 등록해야 한다는 건데요, 2009년 9월 방통위가 이통사의 이용약관에 이를 포함시키는 걸로 결정하면서 마침내 아이폰 출시가 허용됩니다. 이때 월스트리트저널은 “아이폰이 세계에서 가장 비싸고 폐쇄된 한국 휴대전화 시장을 깨뜨려 개방할 것”이라고 했다는군요.

(참고로 언론에 소개된 이 때 관계자들 발언. 이석채 KT 당시 회장 “아이폰에 빠지면 일 못한다”, 강국현 당시 KT 마케팅전략담당 상무 “제조사∙이통사 결합 의한 ‘닫힌 정원(walled garden)’ 자체가 달라지고 있다”, 최지성 당시 삼성전자 사장 “극성스런 네티즌 탓, 아이폰 열풍 길지 않을 것”, 남용 당시 LG전자 사장 “애플 창조성 배울 것”)

국내 첫 안드로이드폰 '모토로이'. 모토로라 제품이다.
아이폰은 출시 직후 2주만에 11만대가 팔려나갑니다. 물론 국내 제조사들도 아이폰 열풍에 속수무책 당하고 있지만 않았죠. 삼성전자가 2010년 3월 회심의 ‘갤럭시S’를 내놓고 응대를 시작합니다. 이보다 한 달전인 2월 10일 SK텔레콤이 국내 첫 안드로이드폰 ‘모토로이’를 내놓은 이후 안드로이드 진영의 대공세가 본격화됐구요. 팬택은 ‘스마트폰 올인’을 선언합니다. 앞서 해외 구글은 2008년 10월 T모바일과 함께 안드로이드 OS를 탑재한 첫 구글폰(T-모바일G1)의 판매를 시작했습니다. 아이폰을 정조준한 것으로 평가되는 이 단말기는 HTC가 제조했으며, 가격은 199달러였습니다.

아이폰을 정조준한 구글 진영의 첫 안드로이드폰 'T모바일G1'. 가장 최근 넥서스5X와 넥서스6P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구글폰'의 효시다.
이 과정에서 아이폰을 출시한 KT는 삼성전자 옴니아2와 갤럭시A, 갤럭시S, 갤럭시탭 등을 공급받지 못합니다. 나중 이석채 회장이 쇼옴니아폰을 두고 “호부호형 못하는 홍길동 신세”라고 토로하기도 했다는군요죠.( KT는 갤럭시S2부터 삼성 단말을 공급받습니다) 

당연, 스마트폰 가입자는 폭발적으로 증가했습니다. 스마트폰 가입자 1000만 시대를 연 게 아이폰 도입 1년 4개월 뒤인 2011년 3월말이었고, 그 뒤 7개월 만에 2000만명, 다시 9개월만에 3000만명 시대를 엽니다. 아이폰 도입 직전 4800만 휴대전화 가입자 중 스마트폰 이용 비율이 전체의 3%에도 못미쳤던 것에 비하면 그야말로 상전벽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스마트폰 지각생이었지만, 가장 빠른 스마트폰 보급률을 자랑하기도 했죠. 이런저런 이유로 국내 휴대폰 시장은 아이폰 이전과 아이폰 이후로 나뉜다고 하죠. 벌써 아이폰7 얘기가 모락모락 나오고 있습니다. 갤럭시S7 루머와 함께 말이죠.

[진화는 역사를 먹고 산다. 이 당위가 맞다는 전제 아래 새로 '박영주의 그때그시절 IT'를 시작합니다. 개인이든 기업이든 부침이 많은 한국 IT/모바일 역사입니다. 오늘 없는 어제 서비스도 많습니다. '모토로라로 시작해 아이폰으로 귀결된' 휴대폰 '오늘'도 내일이면 어제가 됩니다. 들여다보면 '역사'에서 재미만큼 배울 것도 많습니다. '그때그시절'을 통해 우리 IT/모바일의 내일을 만나보자는 역설도 담고 있습니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