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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10주년> 정약용, 세계를 바꿀수 있는 학자의 DNA

<창간 10주년> 정약용, 세계를 바꿀수 있는 학자의 DNA

기사승인 2015. 11. 1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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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임마누엘 경희대 교수 겸 본지 고문
정약용
일러스트=/변혜준

‘국경의 붕괴.’

역사상 오늘날처럼 국경의 의미가 퇴색한 적은 없었다. 이웃나라의 일이 결국 전세계의 이슈가 되는 오늘, 세계인으로서 한국인들이 갖춰야 할 소양에는 무엇이 있을까.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틀에 갖히지 않고 글로벌 리더가 되기 위한 요건을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한국이름 이만열) 경희대 국제대학 교수는 우리나라의 ‘선비 정신’에서 찾았다.

선비 정신이란, 단순히 유교적 교양을 갖춘 사대부(士大夫)의 정신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인격의 완성을 위해 끊임없이 정진하며 죽을 때까지 학문과 덕을 쌓아야 한다.

대의를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불굴의 정신으로 시류에 연연하지 않고 청렴과 청빈하게 사는 선비야말로 현대 사회의 무분별한 물질주의에 대처하는 최고의 롤 모델이라 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글로벌 리더의 DNA는 이미 한국인의 피에 녹아 있다.

지금 세대들은 예전과 다르게 교사와 지신인의 역할에 의문을 갖는다. 사실 지식인 스스로 지적 추구 활동을 저명한 학술지에 실릴 출판물 정도로 표준화하며 축소시키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컨설팅 회사의 직원이 요구하는 과제를 충족시켜주는 로봇과 다름없는 행위다.

지식인의 가장 중요한 역할은 우리 사회의 감시자로서의 활동이다. 사회적 불평등과 생태계 파괴가 심각한 오늘날, 지식인의 역할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지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한국의 유학자인 다산 정약용의 업적을 보면, 생각이 깊은 지식인이 자신의 철학과 인생을 온전히 통합해 얼마나 다양한 담론을 펼쳤는 지 알 수 있다. 당시 문화, 윤리, 역사와 정책까지 그가 담론을 펼치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정약용의 업적은 유교 전통에서 가장 독창적인 학론을 펼친 학자 중 한 사람으로, 한국을 비롯해 전세계에서 다양한 연구 주제로 활용되고 있다.

높은 집중력과 놀라운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중국 고전, 중국과 한국 역사, 심지어 서양과 일본 학문까지도 다독했다. 사소한 부부에 집중하고, 평범한 시민에 대한 내용을 주의 깊게 보는 것이 그의 독서습관이었다.

철학에서 자연 과학, 기계 공학에서 외교까지 정약용의 지적 탐사의 범위는 너무나 방대해서 ‘주제’는 오히려 중요치 않았다.

그가 가장 주목한 개념은 ‘선비 정신’이었다. 그는 세상에 윤리적으로 참여하는 ‘선비 정신’을 지식인이라는 역할을 한정시키지 않고, 18세기 한국을 넘어 오늘날 전세계의 한계를 뛰어 넘을 수 있는 한 방법으로 생각했다.

그는 동시대의 다른 유학자들과는 다르게 모든 분야가 자신의 도덕적 의무의 한 부분으로써 적당한 연구 주제라고 느꼈다. 실제로 그의 저서에는 문학과, 정책, 기술, 미학적 분야까지 윤리적 문제를 일관되게 제시하고 있다.

한국의 윤리학자라고 볼 수 있는 정약용은 ‘선비’의 전통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선비는 한국 뿐만 아니라 중국과, 베트남 등에도 각각 상응하는 개념이 있지만 한국의 선비는 엄청난 양의 글과 주석에 견딜 수 있는 지식인으로 소양을 갖춰야 할 뿐만 아니라 윤리학자로의 면모도 뛰어나야 했다.

당시의 고증학(考證學)은 과학적인 정밀함이 두드러진 뛰어난 학문이었지만, 그 시대의 사회경제적 문제와는 괴리가 있었다. 이 극단적인 괴리는 상류층과 가난한 농부 사이의 엄청난 교육과 문화적 차이를 벌렸다. 이 사회적 격차는 1850년도의 태평천국 운동을 불러 일으켰다. 이 운동으로 중국의 경제는 극심한 피해를 입었고, 사상적 토대 또한 분열됐다.

그에 반해 정약용은 사회의 건강과 농민들의 이익에 늘 유념했다. 그의 학문 연구를 사회와 경제의 유기적인 하나의 덩어리로 여겼으며, 전통에서의 독립과 용감한 새로운 사상의 독립을 옹호했다.

오늘날 목민심서를 읽어보면 정약용이 조선시대 후기에 마주쳤던 문제들이 아직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여러 관점에서 더 심각해진 것 같다. 우리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고, 여러 지도자들은 자기 스스로의 생각이나 독창성에 따르지 않고 오히려 대중매체 등을 통한 접근에 의존하고 있다.

현재 우리는 청년을 위한 롤 모델을 지식인이 아닌 가수와 배우에게서 찾는 ‘온라인 사막’에 직면해있다. 교수들은 특정 학술지에 실기 위한 논문을 작성하고 얼마나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느냐에 따라 평가를 받는다.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한 그들의 업적은 무시 받는다. 학생은 학교의 제품이 됐고, 교사는 학생을 위한 제품이 됐다.

지식인들은 수상하거나 모호한 위원회에서 활동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자 피상적인 의식만을 행하고 있다. 학구적인 학식은 배움이나 사회에 대한 봉사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특정 목표를 달성하면 금전적인 포상이 주어지는 일이 되고 말았다. 시민들과 소통하면서 자신의 학식을 사회의 실질적인 문제에 적용해야 할 동기가 전혀 주어지지 않는 것이다.

정약용을 이해하는 노암 촘스키를 인용하는 것이 적절해보인다. 촘스키는 자신의 저서 ‘지식인의 책무’를 통해 다음과 같이 썼다.

“지성인의 의무에 관해 다른 불편한 질문들이 있다. 지성인은 정부의 거짓말을 폭로하며, 원인과 동기 그리고 종종 가려진 의도에 따라 행동을 분석해야 할 위치에 있다.

서양 사회에서 지성인은 정치적 자유, 정보의 접근, 표현의 자유에서 나온 권력을 갖고 있다. 소수의 특권 계층은 서양의 민주주의로 인해 여가 생활, 편의 시설, 그리고 왜곡과 오해, 이념과 계급 이익에 가려진 진실을 찾기 위한 훈련을 받는다. 이를 통해 현재 역사의 사건들이 우리에게 나타난다.”

조선시대에는 노암 촘스키가 누렸던 표현의 자유가 가능하지 않았다. 정약용 또한 촘스키처럼 이렇게 강한 어조로 비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약용은 촘스키의 접근법과 비슷하게 동시대 지성인들을 비판한다.

정약용은 적은 인원을 모아 세종대왕의 집권 하에 행해지는 정책을 통해 조선 사회에 넓은 변화, 즉 개혁을 이끌어내려고 했다. 비록 개혁은 오래가지 못했지만, 한국은 다음 몇 세기 동안 갖지 못했던 어느 정도의 활력을 찾을 수 있었다.

그의 저서는 한국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한 인물로 비춰지면서 1930년대에 점점 더 주목을 받았다. 오늘날 정약용은 ‘실학’의 핵심 인물과 젊은이들에게 영감을 준 지식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그가 생각했던 한국의 가능성이 다 발휘된 것인지는 아직 의구심으로 남는다.

정약용이 끼친 가장 위대한 영향은 아직 대한민국에 도달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 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Emanuel Pastreich)교수는 예일대에서 중문학 학사 학위(1987), 동경대에서 비교문화학 석사 학위(1992),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 언어문화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일리노이대 동아시아언어문화학과 교수, 조지 워싱턴대 역사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현재는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 겸 아시아 인스티튜드 소장으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세계석학들 한국미래를 말하다’ 등이 있다. 

정리 김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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