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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치대 100주년] 한국치의학 발자취

[연세치대 100주년] 한국치의학 발자취

기사승인 2015. 11. 04.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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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치대가 100주년을 맞았다. 연세치의학 100년사는 한국치의학의 발자취와 다름 없다. 세브란스의 도움으로 연세치대의 발자취를 돌아봤다.

우리나라 근대 치의학 교육은 1915년 11월1일 미국 치과의료선교사 ‘윌리암 셰플리’가 세브란스의전에 독립된 치과학교실과 세브란스병원 치과를 개설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치과의료선교사인 J.L. 부츠는 미국 치과대학부속 병원에 준하는 방사선촬영장비와 전기엔진이 달린 유니체어를 갖추는 등 첨단 치료 및 진단시설을 확충했다. 본인과 가족 모두가 한복을 입고 미국 전역을 돌며 한국치과 발전을 위한 기자회견을 자청, 모금 운동을 펼쳤다. 또 미국치과의사협회에 지원을 호소해 1931년 10월 건평 397㎡에 3층 규모의 세브란스병원 부속 치과진료소를 개원했는데 당시 동양최대의 규모의 독립된 치과진료센터였다.

연세치대
진료 중인 쉐플리 선교사,1917년 *자료=연세치대
1885년 설립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의학 교육이 시작된 세브란스의전과 같이 셰플리·부츠·맥안리스 등 치과의료선교사의 궁극적인 목적도 한국인 스스로 교육을 하고 필요한 인재양성을 하는 교육기관 설립이었다.

이를 위해 세브란스의전 에비슨 교장과 함께 치과의료선교사들은 미국 치과대학 교육과정에 준한 세브란스 치의학전문학교를 설립하고자 수차례 조선총독부에 학교설립인가를 신청했지만 모두 거부됐다.

당시 총독부는 세브란스의전을 통해 한국인 의사들이 배출된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다. 치과분야만큼은 통제하에 두고자 세브란스의 치의학전문학교 인가를 불허하고 대신 경성치의학전문학교를 설립했다.

세브란스의전 치과교수들은 경성치의전 출신의 한국인 졸업생을 받아 5~6년씩 미국식 치과수련교육을 시행하고 우수한 학생들은 미국으로 유학을 보냈다. 그중 이유경은 미국 피츠버그치대를 졸업해 한국인 최초의 미국치과의사 학위(DDS)를 획득했다.

이들 세브란스 치과학교실 수련생들은 점차 한국인 치과교수로서 세브란스 의전에 교육과 진료를 담당하는 한편, 일제말기 강제추방당한 치과의료선교사의 공백을 메웠다. 또한 해방 후 한국치의학 분야를 재건하고 발전시키는 치과계 지도자로서 자리매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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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개원한 세브란스 치과진료소 전경 *자료=연세치대
해방 후 6·25동란으로 세브란스 치과대학의 설립은 지연됐다. 1957년 연희대와 세브란스의대가 연세대학교로 통합되면서 세브란스의대 치과학교실도 연세의대 치과학교실로 새로 출발했다.

1967년 학교설립을 문교부로부터 인가받아 1968년 3월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첫 신입생 40명을 선발한다. 개교 후 연세대학교 치과대학은 신축 교사와 부속 병원을 속속 건립하는 한편 한국치의학을 이끄는 수많은 치과의사와 치의학자를 배출하고 있다.

연세치대는 학교설립 전인 1965년부터 세브란스병원 의학기술과를 설치하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전문적인 치위생사 및 치기공사 교육을 시행했다. 이후 의학기술수련원으로 확대하고 치과대학과 치과병원 설치 후에는 더욱 전문적인 교육이 이뤄졌다.

2000년까지 총 603명의 치과위생사를 배출했으며, 졸업생들은 국내 치위생사회 중추로서 한국 치위생계를 이끄는 핵심인재로 성장했다. 2001년 연세대학교 원주의과대학 내에 국내 최초의 4년제 치위생학과 설치를 교육부로부터 허가 받았으며, 2002년 3월 40명의 첫 신입생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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