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칼럼]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회

[칼럼]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회

기사승인 2016. 10. 24. 09:54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하늘을 나는 작가' 지병림의 세상만사
얼마 전 서울에서 승객을 태우고 목적지로 향하던 택시기사가 운전 중 심정지 증세를 보이자 뒷자리에 있던 승객들이 이를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택시기사가 극심한 가슴통증과 호흡곤란을 호소하는 데도 뒷좌석에 있던 승객들은 트렁크에 실려 있던 자신의 골프채만 챙겨 유유히 사라졌다. 뒤늦게 구조대가 도착했을 때 택시기사는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다. 이런 사건이 올해 들어 벌써 두 번째다. 결국 이 사건은 우리 사회의 경종을 울려 '착한 사마리아인 법'이 국회에 정식으로 제출되기에 이르렀다. 
 

성경에서 유래된 '착한 사마리아인 법'은 위험에 빠진 타인을 돕지 않고 방치한 사람을 법으로 다스린다는 내용이다. 당시 사마리아인들은 유대인의 멸시와 천대를 받았다. 그런데도 착한 사마리아인은 강도를 만나 피를 흘리며 죽어가던 유대인의 목숨을 살려낸다. 유대인 제사장과 레위인이 유유히 이를 지나친 후의 일이었다. 사실 '착한 사마리아인 법'은 유럽과 미국에서 '구조 거부죄'란 이름으로 실행된 지 오래다. 고(故)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의 자동차 사고현장에서 구조 대신 사진촬영에 열중하던 파파라치들도 모두 같은 죄목으로 처벌 받았다.
 

기내에서 갑작스런 심정지가 발생할 경우 즉각적으로 심폐소생술을 실시해야 한다. 1분1초라도 빨리 골든타임을 확보해야 꺼져가는 생명을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심장마비와 같은 위급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항공승무원의 직무는 늘 고객의 필요와 안전에 맞춰져 있다.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모든 승객을 내 가족처럼 대우하되 몸이 불편하신 분이나 노약자, 임산부들에게 더 갖은 정성을 쏟는다. 우는 아이에게 간식과 장난감을 건네고, 몸이 아픈 승객들을 간호하는 현장에 적을 둬온 필자로서는 그토록 위급한 상황에서 제 짐만 챙겨 사라진 이들의 입장을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 씁쓸한 사건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필자는 카타르 사막 한 가운데서 큰 곤혹을 치르고 말았다. 모처럼 사막투어에 나섰는데 자동차 바퀴가 그만 모래언덕에 파묻힌 것이다. 데일 듯 뜨거운 태양의 입김을 맞으며 바퀴를 빼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그럴수록 바퀴는 모래 늪으로 더 깊이 빨려들었다. 휴대용으로 가져온 물도 태양열에 뜨끈뜨끈 달아올랐다. 가뭄에 갈라지는 논바닥처럼 입술과 목이 바짝 타들어갔다. 여차하면 탈진해 버릴 것만 같았다. 차를 버려두고 오로지 종종 걸음으로 사막을 벗어날 자신이 없었다. 맥없이 주저앉던 그 때 멀리서 바비큐를 굽던 관광객이 멈칫멈칫 다가왔다. 하지만 그들은 남의 일을 거들다 공연히 휴가만 버릴 수 있다고 판단했는지 이내 걸음을 되돌렸다. 야속하기가 이를 데 없었지만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내가 여태껏 살면서 베풀어온 선행이 있다면 신이 난관에 봉착한 나를 결코 모른 체 하시지 않으리란 믿음밖에 기댈 곳이 없었다.  
 

그 때 어디선가 거대한 사륜자동차가 힘차게 멈춰섰다. 운전석과 조수석에서 덩치가 산만한 아랍 남성이 하나씩 튀어나왔다. 그들은 잰 손놀림으로 밧줄을 꺼내와 자동차 앞뒤로 연결해 힘차게 끌어당겼다. 얼마 후 자동차 바퀴가 평지 위로 제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자리에서 뛰어올라 환호성을 질렀다. 감사의 마음을 표할 마땅한 방법을 몰라 급한 대로 지갑에서 지폐 몇 장을 꺼냈다. 가는 길에 시원한 물이라도 한 병씩 사드시란 뜻이었다. 그러자 남자들은 화가 난 듯 거칠게 손사래를 쳤다. 함둘라! 신께 영광을! 그들은 하늘을 향해 영광을 돌리고는 이제 본분을 다 했다는 듯 쏜살같이 사라졌다. 인종 불문하고 제일처럼 남을 보살핀 신성한 마음을 본의 아니게 욕되게 한 것 같아 내심 민망했다.
 

이슬람 사회에선 일상 속에서 실천한 선행과 미덕이 쌓여 대대손손 내세의 복으로 돌아온다고 믿는다. '이슬람'이란 말의 어원 자체가 '평화'에서 유래되었다. 이슬람 사람들은 위기에 봉착한 이웃을 구함으로써 코란의 신성한 가르침을 실천한다고 믿는다.
 

우리에게도 남을 배려하고 인명을 중시하는 아름다운 풍속이 대대손손 전해 내려왔다. 우리 민족은 굶주리거나 위기에 처한 이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 하고 십시일반(十匙一飯)으로 온정을 베풀었다. 김장철이면 한데 어우러져 김치를 담그고, 잔칫날 품앗이를 하며 이웃과 돈독한 정을 나눴다. 먼저 베풀고 나눈 만큼 고스란히 복이 되어 돌아온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힘없고 나약한 서민이지만 결국 안타깝게 고인이 된 택시기사도 우리 사회의 소중한 일원임은 분명하다. 우리가 어린이, 노약자, 서민의 생명부터 소중히 여길 때 내 아이와 연로한 부모님은 물론 장차 다가올 자신의 노후까지 안전하게 지킬 수 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사회, 아직 늦지 않았다.



지병림 작가는
카타르항공 객실 사무장, 작가, 산업인력공단 K-MOVE 멘토로 활동하고 있으며 '아랍항공사 승무원 되기' '서른 살 승무원' '매혹의 카타르' 등의 저자이기도 하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