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칼럼] 제왕적 국회를 어찌할 것인가

[칼럼] 제왕적 국회를 어찌할 것인가

기사승인 2017. 01. 25. 06:30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이우근 변호사 사진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고문
“혁명은 폭동이다.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뒤집어엎는 폭력행위다.” 모택동 어록에 있는 말이다. 모택동을 신처럼 떠받든 홍위병들은 그 신의 계시에 따라 중국대륙을 핏빛으로 물들이는 폭력을 휘두르며 소위 문화혁명을 희대의 반문화적 광란으로 몰아갔다.

모택동의 계급투쟁론이 아니더라도, 모든 혁명은 폭력을 수반한다. 혁명세력이든 반혁명세력이든, 어느 한쪽은 폭력적이다. 양쪽 모두가 비폭력이거나 비무장일 경우에는 혁명의 필요가 없다. 권리선언·권리장전으로 영국의 절대왕정에 종지부를 찍은 명예혁명도 윌리엄 3세의 강력한 군대가 뒷심으로 버텨주었기에 성공이 가능했다.

국회의 국정조사, 검찰과 특검의 수사, 법원과 헌재의 심판 등 입법·사법·행정의 3부 권력이 총동원된 전대미문의 대통령 탄핵 정국 속에서, 어느 유력 정치인이 ‘헌법재판소가 대통령 탄핵을 기각하면 다음은 혁명밖에 없다’고 공언했다. 헌법절차를 무시해도 좋다는 폭력시위의 선동은 아닐 것으로 믿는다. 백여만명의 촛불시위·태극기시위가 수개월에 이르도록 큰 충돌 없이 평온과 질서를 지켜오는 것은 오늘의 혼란한 사태가 헌법절차에 따라 평화롭게 수습되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입헌민주국가에서 정치체제의 변화는 오직 선거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혁명이 있다면 폭력혁명이 아니라 선거혁명이 있을 따름이다. 그러나 선거결과로 나타나는 민의도 절대선(絶對善)은 아니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선출된 권력이라고 해서 무소불위의 특권을 가질 수 없는 이유다. 선거현장은 포퓰리즘에 취약하기 마련이고, 포퓰리즘은 국가적 불행으로 직결된다. 영국의 경제분석기관인 옥스퍼드 이코노미스트는 한국을 포퓰리스트 정치인의 집권가능성이 세계에서 네 번째 높은 나라로 지목했다.

아니나 다를까, 선거가 가까워오자 포퓰리즘의 공약들이 쏟아지고 있다. 청년·아동·노인에게 매달 30만원씩을 무상으로 지급하겠다는 기본소득 공약이 나오더니, 현재 1년 9개월인 현역병 복무기간을 10개월로 줄이겠다는 공약까지 등장했다. 핵무기를 가진 북한의 현역병 복무기간은 10년이다. 표만 얻는다면 안보전선이 흔들려도, 국가재정이 파탄 나도 괜찮다는 것인가. 성장 동력을 키우면서 양극화와 불평등 구조를 근본적으로 혁신하기 위해 땅을 갈고 씨를 뿌리는 원대한 정책구상은 없이 단지 갈택이어(竭澤而漁)의 속임수만 넘쳐난다. 연못의 물을 모두 퍼내 물고기를 다 잡아먹은 뒤에는 다시 잡을 물고기가 없어 굶을 수밖에 없다.

개헌도 선거공약의 단골 메뉴다. 대통령의 권한을 일정 부분 국회에 넘기는 이원집정부제나 내각책임제 개헌론이 힘을 얻고 있다. 본업인 입법활동은 제쳐둔 채 허구한 날 정쟁에만 몰두하는 국회가 행정권까지 장악하겠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국회의 인사청문회나 국정조사·국정감사 현장을 보노라면 제왕적 국회 역시 제왕적 대통령 못지않게 시급히 시정되어야 할 반민주적 폐해임이 금방 드러난다. 막말, 모욕, 호통의 인격적 폭력이 난무하는 청문회장에는 법도 없고 인권도 없고 명예도 없다. 만약 법정에서 재판장이 국회 청문회처럼 피고인이나 증인을 신문했다가는 그날로 당장 사표를 써야할 것이다.

제왕적 대통령도, 제왕적 국회도 모두 권력분립의 헌법원칙에 어긋난다. 대통령의 권한 축소와 함께 국회의원의 각종 특혜·특전도 대폭 축소해야 한다. 국회의원 입후보 요건의 강화, 의원 정수의 감축, 의원 보수의 삭감, 면책특권과 불체포특권의 엄격한 제한이 포함되지 않은 내각제개헌은 제왕적 국회권력을 더욱 강화할 따름이다. 아울러 대통령의 중임 제한처럼 국회의원의 ‘무한 중임’도 규제의 대상이 아닌지 면밀히 검토할 때가 됐다. 국회가 평생직장, 신의 직장이 되지 않도록 국민적 감시 장치를 마련할 필요성이 크다.

“희망은 헛되다. 절망이 그런 것처럼.” 루쉰(魯迅)의 말이다. 정치개혁의 희망을 품고 투표장에 나간 유권자들이 선거 후에 그 희망이 망상이었음을 깨닫는 불행이 되풀이될까 걱정이다. 희망이 헛되다고 해서 절망할 수야 없지 않은가. 개혁의 대상이 개혁을 주도하는 것은 위선이자 기만이다. 국회 개혁이 싫은 국회의원은 개헌을 말하지 말라.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