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칼럼] 오슬로의 빈 의자

[칼럼] 오슬로의 빈 의자

기사승인 2017. 07. 28. 14:04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이우근 변호사 사진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고문 (숙명여대 석좌교수)
2010년 노벨평화상 시상식장에서 가장 빛났던 자리는 수상자가 앉지 못한 빈 의자였다. 국제펜클럽 중국본부장을 역임하고 2008년 10월의 ‘08헌장(零八憲章)’을 기초한 중국 인권투쟁의 기수 류샤오보(劉曉波) 변호사가 앉을 자리였다. 국가전복선동죄로 11년형을 선고받은 그는 당시 감옥에서 간암으로 투병 중이었고, 본인은 물론 가족의 출국도 허락되지 않았다. 노르웨이 오슬로 시청에서 열린 노벨상 시상식에 수상자의 빈 의자가 놓이게 된 사연이다.

노벨상 시상식장에 빈 의자가 놓인 것은 류샤오보의 경우가 처음이 아니다. 193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의 의자도 비어있었다. 1929년 반역죄로 1년 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받은 독일 언론인 카를 폰 오시에츠키가 앉을 의자였다. 반전(反戰)운동 잡지 <세계무대>의 편집장이었던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참상을 몸소 체험한 뒤 격정적인 반전 논설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히틀러 집권 이후 반(反)나치운동의 선봉이 되었다. 독일국민의 열광적 지지를 받던 나치 극우민족주의의 위험성을 오시에츠키만큼 꿰뚫어본 선각자는 달리 없었다.

게슈타포에 체포된 오시에츠키는 수용소에서 혹독한 고문을 당한 끝에 이빨이 뽑히고 다리가 부러진 상태로 죽음보다 더 괴로운 삶을 견뎌야했다. 국제적십자사와 작가 토마스 만,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 등 저명인사들이 그의 석방과 노벨평화상 수여를 촉구하면서 구명운동에 나섰지만, 나치독일의 무력 개입을 두려워한 노벨상위원회는 오시에츠키의 평화상 수여를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개최를 앞두고 국제적 여론을 의식한 독일이 오시에츠키를 병원으로 이송하자, 노벨상위원회는 비로소 그를 전년도인 1935년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소급해 선정, 발표했다. 그러나 히틀러 정권은 오시에츠키가 노벨상을 받지 못하도록 그의 출국을 막았고, 독일국민의 노벨상 수상을 금지한다는 특명까지 발동했다.

스탈린 치하에서 8년 동안 강제노동수용소에 감금되었다가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수용소군도> <암 병동> 등 뛰어난 작품들을 발표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은 1970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지만, 브레즈네프 독재정권은 그의 작품들을 모두 금서(禁書)로 지정하고 소련작가동맹에서 제명했다. 그의 작품은 소련 내에서 출판되거나 어떤 매체에도 실릴 수 없게 되었다. 공산정권의 탄압으로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한 솔제니친은 미국으로 추방되어 망명생활을 하다가 1974년 뒤늦게 노벨상을 받았다.

러시아혁명의 비인간성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의사 지바고>로 195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소련 당국의 국외 추방 협박에 시달리던 끝에 “조국을 떠난다는 것은 내게 죽음을 의미한다”고 밝히며 노벨상 창설 이래 최초로 수상을 거부했다. 파스테르나크에게는 수상식의 빈 의자조차 허용되지 않은 것이다. 노벨상위원회는 그해 노벨문학상 시상식을 보류했고, 1989년 그의 아들이 대신 받았다.

“표현의 자유는 인권의 기초이자 인간 본성의 바탕이며 진리의 어머니다.” 시상식에 참석하지 못한 류샤오보가 노벨상위원회에 보낸 수상 소감이다. 그는 가석방으로 풀려난 지 보름 남짓한 7월 13일 병사(病死)했다. 유엔은 물론 각국 정부가 고인을 추모하고 국제펜클럽 등 세계의 문인·인권단체들이 중국 정부의 비인도적 처사를 비판하는 것과 달리, 한국 정부와 국내 인권단체들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다. 비정부기구까지 중국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가.

노벨상 시상식의 빈 의자는 그냥 빈(空) 의자가 아니었다. 그 자리는 극우·극좌 파시즘에 항거하는 민주·인권의 울림이 가득한 ‘텅 빈 충만’의 자리였다. “사랑하는 이여… 당신의 죄수가 된다면 시간의 구속 없이 나는 영원히 당신의 감옥에 갇히겠습니다.” 인권투쟁의 동반자였던 아내에게 류샤오보가 남긴 글이다. 중국 정부는 유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의 유해를 화장한 뒤 바다에 뿌려 류샤오보의 흔적을 지우려했지만, 그가 걸어온 인간애의 큰 발자취는 오슬로의 빈 의자와 함께 인류의 기억 속에 뚜렷이 새겨질 것이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