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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영화 ‘신과 함께’는 법정 드라마

[칼럼]영화 ‘신과 함께’는 법정 드라마

기사승인 2018. 01. 30. 09: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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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우리나라에서 영화가 천만관객을 동원했다는 것은 분명 하나의 현상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볼 마음이 없다가도, 같은 이유로 본 영화가 벌써 꽤 된다. 그러나 이젠 천만이라는 숫자는 기삿거리로 그 의미가 쇠퇴한 듯싶다. 이제 기사는 스코어를 따진다. ‘절대숫자’로서 ‘천만’은 그 의미를 이미 상실하였고 ‘상대적 수치’가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숫자가 스코어를 만나면, 게임의 법칙에 따라 당연히 최종결산이 필요하고, 그 결과는 랭킹이 된다.

개봉한 지 한 달여가 지난 시점에서 ‘신과 함께’는 천만 관객영화 순위 랭킹 3위를 달리고 있다. 현재 추이를 보아서는 역대 랭킹 1위인 영화 ‘명랑’은 넘지 않을 것 같으나 매우 선전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여하튼 ‘천만’이라는 숫자는 그 자체로 유의미하다. ‘좋은 영화’ ‘나쁜 영화’, 혹은 ‘이상한 영화’를 따지기 전에, ‘천만의 욕망’이 투영된 ‘절대 반지’가 가리키는 지표를 쫓아, 어떤 요소가 집단 무의식으로 작동해 대중을 극장으로 이끌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먼저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바로 알 수 있듯이 ‘신과 함께’는 법정드라마의 포맷을 하고 있다. 흥미로운 다른 점이 있다면, 관객이라는 매우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위치의 ‘바라보는 자의 권위’가 무의미해지고, 영화를 보는 사람들 모두를 ‘잠재적 피고’가 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자명하게도 ‘죽음의 심판’에 자유로운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죄와 벌’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죄를 짓고 벌을 받는 숙명은 인간의 몫이기에 우리의 일상은 우리를 잠재적 범죄자로 만들 요소로 차고 넘치므로 우리는 늘 ‘법정에 선 피고’가 될 준비가 돼 있다. 쉽게 말해, 삶 자체가 ‘선택적 상황’이라는 심판대이며, 거기서 냉큼 ‘욕망이라는 전차’에 올라타지 않는 특별한 이는 드물다 못해 가문 것이 우리네 인생사이다. 만약 이 영화를 보고 “나는 영화를 보는 동안 피고가 아니었다.”를 주장하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그는 극장에 초대받지 않은 불청객으로서 이미 ‘원귀’가 된 자이거나 ‘저승처사’이지 않은지 반문해 본다.

잠정적으로 피고가 되는 의례는 마치 자신의 죽음을 체험하기 위해 행해지는 입관식과 닮아 있다. 일정한 형식을 갖춘 후에 관 속에 자신의 몸을 스스로 누이고 나서 도움 주는 이들이 관 뚜껑을 닫으면 대다수의 사람들은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다고 한다. 왜일까? ‘우울과 슬픔’이라고 하기엔 궤가 다른, 수행자는 이제 ‘연민이나 성찰’ 위에 자신을 올려놓는다. 분명한 것은 후자 모두가 ‘피고의 덕목’이라는 사실이다. 연민과 성찰이라는 덕목을 수행하는 피고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구원이다. 타자에 대한 일만치의 연민도 없이 스스로 구원하는 자가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는, 이창동 감독이 영화 ‘밀양’에서 너무나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다. 극 중 감옥에 수감 중인 유괴살인범이 자신을 용서하러 면회 온 피해아동의 어머니 앞에서 보인, 지켜보는 이로 하여금 온몸의 솜털을 세우게 하는, 그 평온한 표정만큼 ‘역설적인 폭력’은 더 이상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이벤트를 통해 관 속에 누워 잠시 일상을 밀어낸 채 영화를 보며 잠정적 피고가 되고, 자신를 연민하고 성찰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한다. 이것이 영화 ‘신과 함께’가 대한민국 인구의 4분의 1이 보게 된 동력이라고 할 수 있다. 거기에다 어머니라는 희생의 코드가 가미돼 대중에게 어필하고 있다면 이미 좋은 기획 상품이다. 잘 기획된 제품을 멀티플렉스라는 원스톱서비스로 공급해, 편리하면서도 적당히 허기를 채워주는 영화라는 ‘집단적 기억’의 촉매제를 통해 대중을 ‘정화’시켜 극장을 나서게 한다. 밖으로 나온 세상은, 잠시 심판대를 치우고, 이제 그래도 살만한 곳이 돼 있다.

연장 선상에서 ‘신과 함께’에서 전개되는 스토리텔링의 비밀에 대해 천착해 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인 법정드라마의 스토리텔링은 세간에 사실이라고 받아들여지는 혹은 주장되는 사건의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을 드러내고자 한다. 간혹, 리처드 기어와 에드워드 노튼 주연의 ‘프라이멀 피어’와 같은 영화처럼, 주인공이 고군분투 끝에 마침내 진실을 밝혀내지만 바로 그 진실이 거짓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진실과 직면한 단독자로서 주인공을 정면으로 클로즈업 시킴으로써 어쩔 수 없이 진실과 조우할 수밖에 없는 전지적 관찰자로서 관객인 우리와 시선을 마주치게 한다. 최종적으로 바로 그 진실과 직접 대면하는 단독자의 시선과 정면으로 응시하게 되는 관객은 비로소 진실의 실체에 대한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게 된다. “보라! 진실이 은폐되고 있다는 사실이 진실이다!”

‘신과 함께’ 역시 플롯을 따라가다 보면 여느 같은 법정드라마처럼 진실은 양파껍질 까지듯이 드러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침내 밝혀진 ‘신과 함께’에서의 ‘진실’은 ‘천륜이라는 질서’ 앞에 바로 무력해진다. 천륜은 지켜야 할 가치임에 이의가 없으나 영화에서는 분명하게 왜곡된 점이 발견된다. 문제는 진실을 능가하는 구심점이 강력한 질서의 메커니즘은 반드시 희생을 남긴다는 사실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들이 장애우인 어머니이고 구조현장에서 희생된 소방관이며 군 의문사 희생자라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모두 소외계층인 하나의 가족이다. 진실을 오롯이 안고 부조리하게 사그라져 가는 존재들이 실제로 실체하고 원귀가 돼 구천을 떠돌아도, 그들 중 그렇게 선택된 이들을 호명해 진혼제를 차려주고 희생이라는 이름으로 비석을 세워주고 환생이라는 구원을 담보해 주면 그만인가?

이 지점에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은, 소방관의 경우와 같이 분명한 ‘숭고한 정신’으로서 희생도 있겠으나, ‘군 의문사’처럼 실체가 감춰진, 고귀한 희생이라고 호명하기엔 원통하고 분한 죽음도 많다는 사실이다. ‘신과 함께’의 바로 그 가족은, 그 실체적 진실이 밝혀짐과는 무관하게도, 모두 희생자로 호명돼 환생한다. 그렇지만 그 환생은 더 이상 억울할 것도 없는 원통해 할 것도 없는 이미 전혀 다른 존재이다. 삭풍에 희석된 채 방치된 비석의 이름도 가물가물해져 가게 되면, 실체가 규명되지 않은 진실은 사그라지기일 수이다. 또한 희생자들을 연민하고 죽은 이들을 애도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하던, 적어도 동시대를 숨 쉬던 ‘천만관객’도 결국 사라질 존재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어떤 질서 속에서도 진실은 진실로서 온전히 밝혀지고 남겨져야 한다. 따라서 진실을 억압하는 어떤 질서도 부정돼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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