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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독주의 추락

[칼럼]독주의 추락

기사승인 2018. 02. 27.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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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새해가 시작된 지도 벌써 두 달이 돼 간다. 그 사이 연일 뉴스로 넘친다. 협박 수준에 가까운 4월 전쟁설, 평창올림픽에 대한 소소한 뉴스부터 ‘평화올림픽 대 평양올림픽이냐?’라는 프레임 전쟁, 북한공연단의 ‘김일성가면’ 해프닝 등 그야말로 화제만발이다.

게다가 사회 저간의 적폐문제가 수면으로 떠올라 우리사회의 민낯이 그대로 드러나는 우울한 사건들도 넘쳐난다. 지난 국정농단 뇌물사건에 대한 이해하기 난해한 사법부의 판결, 너무나도 분명하게 드러난 부정혐의로 또 한 명의 전임대통령의 구속이 임박해 보이는 상황, 한 여검사의 용기 있는 폭로로 촉발된 권력을 가진 자들의 성추행사건과 문화예술 및 사회 전반에 드러나는 유사한 권력형 성범죄 사건들, 거기에 네티즌들의 공분을 샀던 평창올림픽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팀추월 경기 출전선수의 부적절한 행동에 대한 논란 등 정신을 차릴 수 없다. 그런데 사회 곳곳에 만연한 적폐를 청산해야 한다는 당위로서 해결 방향이 아닌 역으로 위와 같은 사건의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라는 원인 규명의 문제로 접근하면 이들 사안들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결론부터 얘기하면 이들의 공통분모는 ‘독주(獨走)의 추락’이다. 더 정확하게는 ‘독주 체제의 추락’이라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위 사건들의 중심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확연하게 드러나는 유사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권력의 꼭대기에 있거나 그 권력의 수혜자라는 사실이다. 경제·정치·사법 권력 외에 문화·예술·체육계 권력, 그리고 엘리트 교육 시스템의 수혜자로서 독주체제의 정점에 올랐던 사람들이 속살을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있다. 가히 혁명적이라고 말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추락할 처지에 놓인 ‘독주체제’는 어떻게 구축됐는가?

IMF 이후 ‘문제는 경제야’라는 미명 아래 민주주의 가치보다 자유주의 가치가 우선시 되면서 대한민국은 경쟁체제로 내몰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민주주의 가치는 애초에 공평하지 않은 체제의 모순이 임계 상황에 다다랐을 때야 희생을 치르고, 비로써 수정에 수정을 더해 진전되기도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 수정과정은 현재진행형이다. 그럼에도 빠른 속도로 사회 전반을 점유한 자유주의 경쟁체제에서 이미 암암리에 내정됐던 승자들은 모든 혜택을 독점하고 국가주의가 만든 탄탄대로를 독주하게 된다. 중요한 점은 이와 같은 형상이 자본주의 체제와 궤를 같이한다는 사실이다.

수레바퀴가 쉼 없이 돌아가야만 하는 자본주의 경쟁체제는 그 속성상 시스템을 원활하게 굴리기 위해 기존의 레일과 인적자원을 활용하게 돼 있는데, 이게 바로 청산하지 못한 구태의 기득권 세력들이다. 새로운 레일을 깐다고 해도 이미 독점적인 구심체가 또다시 재투입되는 상황이 반복된다. 그렇게 구축된 독주체제는 공정과 공평이라는 문제에서 심각한 왜곡을 발생시키고, 결국 양극화라는 총체적 난국에 봉착하게 됐다.

쉽게 말해서 돈이 돈을 먹고, 돈이 돈을 굴리고, 그 돈이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다시 모든 것을 잠식하는 구조에서 자동 선택된 경쟁의 수혜자들은 국가가 깔아준 비단길 위에서 유유하게 독주한다. 자유주의 경쟁체제는 수레바퀴에 제동을 가할 틈도 없이 체제의 원활한 흐름을 우선시하기에 기득권 세력들이 아무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것은 오히려 당당해 보이기까지 하다. “왜들 난리야? 이렇게 해야 최상의 성과를 내잖아, 안 그래?”라는 말이 나오는 게 자연스럽기까지 한 이유는 바로 승자독식을 당연시 여기는 신자유주의적 성과주의 때문이다.

시스템 내에서 내정된 수혜자들은 자신들의 성과가 바로 대한민국 국부의 증가라고 생각한다. 누가 벌든지 간에 국가 전체의 합은 같겠으나 분배의 정의가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는 내파되기 십상이기에 언론에게 권력의 일정 지분을 보장하고 지연 전략의 레토릭(수사법)을 구사한다. 경제권력은 언론권력을 통해 자신들의 이윤을 낙수효과라는 그럴싸한 논리로 사회의 전반의 혜택으로 돌아갈 것처럼 세뇌시키고, 정치권력은 기득권인 자신들의 안위만을 국가의 안보로 인식해 왔다. 권력이 체제수호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또한 문화·예술· 교육·종교 등 사회 전반의 포진해 자신들의 왕국에서 예의 그 일방향성을 유지한 채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남근주의적인 소(小)권력들은 정치·경제의 독주체제의 모델을 동일한 방식으로 답습한다.

이와 함께 간과해서 안 되는 것은 위에 언급된 사건들에 등장하는 이들이 언론의 조명을 받을만한, 즉 충분히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이들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최고 경제 권력에 대한 구속수사 및 모호한 재판, 국가 최고 지도자였던 이의 당당하지 못한 추한 말로, 수십 년간 스스로 전설이 된 시인이라는 허명을 가진 노인의 오랜 추행과 ‘어느 날 추락’, 연극계 대부이자 예술가로 추앙받던 연출가의 사이비교주적인 만행, 반듯해 보이는 이미지로 포장되었던 중견 탤런트이자 교수인 자가 자신의 제자들을 상대로 한 추잡한 백태, 동계올림픽 스포츠스타의 오만해 보이는 행동 등 이 모두가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기에 충분하다. 그런데 이들 중 성격이 다른 사건은 여자 스피드스케이팅 팀추월 경기에 출전한 김보름 선수의 행위와 그에 대한 대중의 반응이다.

부적절한 인터뷰로 네티즌의 집중포격을 받는 김보름 선수가 대중의 주목을 받는 이유 중 하나는 그녀의 비웃는 듯한 표정이 언론에 비치면서다. 다른 사례들은 모두 그들의 영토에서 최고의 권력을 이용해 벌인 극단적 독주로, 아무도 이의를 걸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행한 행동들이다. 반면 김보름 선수의 독주는 빙상연맹의 파벌싸움에서 우의에 선 쪽에 속한 자가 보인 집단에 대한 소속감의 한 표현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건들이 체제 자체로서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들의 오만과 독선으로부터 기인한 안하무인격인 행태라면 김보름 선주의 경우 독주체제를 구축하려는 집단에 소속된 개인이 그 집단에 대한 소속감을 자기화해 표현한 왜곡된 행동이다.

김보름 선수를 두둔함이 아니다. 왜 더욱 비난이 가중되는가에 대해 말하고자 함이다. 필자는 그녀의 부적절한 인터뷰 내용과 시쳇말로 ‘썩소’와 같은 비웃는 표정을 함께 접한 대중이 감정에 연쇄반응을 일으켜 더욱 반감이 폭발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빙상연맹의 파벌분쟁에서 앞서나간 집단의 독주하고자 하는 의지가 그녀의 내면에 각인되고 자연스럽게 행동으로 표현된 셈이다. 이번 팀추월 게임은 연습에 불과하고 자신이 메달권이 확실한 다음 경기를 위한 역량 점검이라는 차원에서 게임에 최선을 다해 임했고, 팀추월 경기에서의 실책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을 따라오지 못한 노선영 선수의 책임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행한 느낌을 준다.

추측하건대 코치진에서 팀추월 경기에서 가볍게 기량을 점검하고 메달권이 예측 가능한 매스스타트에 집중하면 된다고 주문하지 않았나 싶다. 즉, 독주를 위한 희생을 당연시하고 팀추월 경기의 팀워크에 어떤 관심과 미련도 두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그런 맥락에서 이런 사실을 막연하게 체감하고만 있던 노선영 선수가 희생됐고, 그녀의 입장에서는 무리한 연습과 출전으로 병이 급격히 진행돼 죽음을 맞은 동생 노진규 선수의 황망한 희생이 중첩돼 경기 후 한동안 벤치에서 일어나지 못한 채 더욱 낙담에 빠진 게 아닌가 생각된다. 이런 상황에서 노선영 선수는 어떤 인터뷰에도 응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경쟁이라는 독주체제의 희생양은 노선영 선수 남매뿐만 아니라 김보름 선수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그녀가 속한 집단인 독주체제의 주문을 수행했고, 미숙한 인터뷰와 ‘썩소’의 이미지로 대중의 공격을 받게 됐다. 그러나 개인을 비난하기 전에 체제의 문제를 면밀히 살펴봐야 한다. 나무를 보다 숲에서 길을 잃는 우를 범할 수은 없지 않은가? 어떤 사건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은 행위자인 그 혹은 그녀가 체제의 수행자인지, 아니면 체제 자체로서 모순의 근원인지를 판단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김보름 선수의 ‘썩소’ 표정과 말, 행동을 비난한다는 것은 최종적으로 우리가 그녀에게 돌을 던지는 것이 된다는 의미다. 이를 통해 우리는 내부자로서 그 체제 안의 자리에서 쉽사리 빠져나오게 된다. 비겁해지는 것이다.

김보름 선수는 체제 자체가 아니라 체제의 사유방식을 습득하고 내면화한 수행자일 뿐이다. 그녀 역시 체제 내부자로서 큰 실수와 그릇된 행동을 보였다. 그녀가 잘못이 없다고 하는 게 아니라 일견 이해되는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보름 선수 말고 여타의 다른 사건들의 주인공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남근적인 독주체제의 정점이며 체제 자체였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17대 대통령을 지냈던 분은 대통령이 되기 전 대선기간에 “저는 그런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누가 내게 돌을 던질 수가 있습니까?” 라고 역설했다. 맞는 말이다. 예수의 말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예수는 간음한 여인을 심판하라는 유대교 지도자들의 교활한 간계를 간파하고 몰려든 군중에게 죄 없는 자만이 그녀에게 돌을 던지라고 주문한다. 예수의 가르침은 체제의 수행자로서 선택된 희생양에게 돌을 던질 것이 아니라 체제 자체에 돌을 던지라는 주문이다. 체제 자체에 이미 포획된 내부자들은 아무도 돌을 던지지 못한다. 대통령을 지낸 그분은 자신을 통해 욕망을 투영하려는 대중의 열망을 간파하고, 그들이 이미 체제내부자로서 체제를 혁파할 수 없는 자들이 되었다는 점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았나 싶다. 우리는 공범이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천우신조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다행히도 우리는 혁명을 통해 체제 자체의 모순이 집약된 18대 전임 대통령을 심판한 경험을 갖게 됐다. 그 경험은 우리의 자긍심을 지키기 충분하다. 따라서 그동안 사회 저간에 깔린 적폐를 청산할 의지는 이미 충만하다고 할 수 있다. 즉, 실천할 수 있는 동력이 마련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현상으로서 부당한 독주의 추락을 주문하기 전에 작동원리로서 독주체제를 비판하고 모순을 찾아 해체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그런 후에 경제·정치·사법·언론·문화·체육·의료·교육·종교 등 사회 전반의 정점에서 왜곡된 언행과 만행에 가까운 추태로 독주체제 자체의 모순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자들에게 의연하게 돌을 던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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