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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평화를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라

[칼럼] 평화를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라

기사승인 2018. 03. 16.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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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변호사 사진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고문 / 숙명여대 석좌교수
역사에는 가정법(假定法)이 없다지만, 오늘의 상황을 과거에 비추어 반성적으로 성찰함으로써 역사의 교훈을 얻는 데는 가정의 상상력이 유용할 수 있을 것이다. 주한미군 철수를 공약한 미국의 카터 대통령이 1979년 6월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야당을 비롯한 민주화운동 세력은 카터와 박정희의 회담이 미국의 인권외교 원칙에 어긋난다면서 두 정상의 만남을 극력 반대했다. 유신체제와 인권탄압을 중지하라는 메시지를 들고 온 카터와 박정희의 만남은 냉랭할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 ‘반정부인사 석방’과 ‘주한미군 철수 연기’라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자주국방에 심혈을 기울이던 박정희는 당시 비밀리에 핵개발을 추진하고 있었다. 카터의 관심이 주로 인권문제에 치중해있던 탓인지 한국의 핵개발문제는 뒤로 처져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미국이 한국의 독자적 핵개발을 결코 용인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하나의 가정을 제기해본다. 만약 한국이 핵개발을 포기하고 그에 대한 대가로 미국이 유신체제를 보장해주기로 합의했다면, 야당과 민주화운동 세력은 그 합의에 동의했을까? 격렬히 반대했을 것이다. 독재체제보장과 핵개발 포기를 맞바꾼 미국을 반민주적이고 비인도적인 부도덕한 국가로 낙인찍지 않았을까?

남북 정상회담이 4월에, 뒤이어 북미 정상회담이 잇따라 열린다. 회담의 주요 의제는 북한의 비핵화와 체제보장이다. 북한의 비핵화에 대한 대가로 세습독재체제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체제보장에는 막대한 경제지원도 예상된다. 궁지에 몰린 독재체제의 숨통을 틔워줄 가능성이 없지 않다. 카터의 방한을 반대했던 당시의 야당과 민주화운동권은 지금의 집권세력이 되어 남북·북미 정상회담을 한반도 평화의 중대한 진전이라고 극찬한다. 물론 1979년과는 상황이 다르다. 북한의 핵위협과 미국의 코피작전 으름장으로 전쟁의 위험이 일촉즉발인 것처럼 보였던 상황에서, 북핵을 폐기하고 한반도의 평화를 이룰 수 있다면 북의 독재체제는 부득불 보장해줄 수밖에 없는 필요악일는지 모른다. 전쟁만 일어나지 않는다면, 1인 독재 아래 신음하는 2500만 북한동포의 고통쯤이야 불가피한 희생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것이 진정한 평화일까? 북한정권의 인권탄압은 사상 유례가 없는 것이다. 오늘날 어떤 독재정권도 제 나라 국민을 그처럼 철저히, 그처럼 오래도록, 그처럼 잔혹하게 짓밟은 적이 없다. 300만 주민이 굶어죽는 곁에서 핵개발에 몰두해온 나라도, 70년이 넘도록 부자손(父子孫) 3대가 절대 권력을 세습하는 유일체제도, 주민의 사상·언론·통신·이주의 자유를 완전히 박탈한 통제국가도 달리 없다. 소위 내재적 접근법으로도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전대미문의 세습독재체제를 보장해주는 대가로 얻는 평화의 의미는 무엇인가?

노르웨이 국제평화연구소를 창설한 요한 갈퉁 교수는 ‘단지 전쟁이 없는’ 소극적 평화와 ‘정의가 실현된’ 적극적 평화를 구별한다. 소극적 평화는 체제에 대한 저항을 폭력으로 탄압하면서 유지되는 역설적 평화다. 그것은 공동묘지의 정적을 평화라고 강변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부도덕하고 정의롭지 못한 가짜 평화다. 마르틴 루터 킹 목사는 ‘평화는 전쟁의 부재(不在)가 아니라 정의의 현존’이라고 갈파했다.

남북·북미의 정상회담을 환영하면서 한반도 평화 정착이라는 큰 성과를 기대한다. 다만 남·북·미의 정상들이 북한의 비핵화와 독재체제 보장을 맞바꾸는 것에 만족할까 우려하는 것이다. 그것은 진정한 평화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나는 합의를 거친 평화는 원하지 않는다. 평화를 가져오는 합의를 원한다.” 정의로운 평화를 향한 헬렌 켈러의 소망이다. 남·북·미의 정상들이 소극적 평화의 합의에 그치지 않고 적극적 평화를 가져오는 합의에까지 나아가기 바란다. 7년 유신독재에 온몸으로 저항한 민주화운동 세력이 70년 세습독재를 보장해준다는 것은 이만저만한 모순이 아니다. 그것이 당장의 전쟁을 막는 유일한 길이라면 현실적으로 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와 더불어 북한동포의 자유와 인권 회복을 위한 민주화 노력도 결코 게을리하지 않아야 한다. 그 노력 없이 함부로 평화를 입에 올리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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