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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수연의 오페라산책]오페라 역사의 위대한 유산, 리코르디 아카이브③

[손수연의 오페라산책]오페라 역사의 위대한 유산, 리코르디 아카이브③

기사승인 2018. 03. 18.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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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코르디 아카이브(Archivio Storico Ricordi) 방문기
푸치니 '라보엠' 초연 무대스케치 원본
푸치니 오페라 ‘라보엠’ 초연 무대스케치 원본./사진=손수연
리코르디 출판사가 200여 년 간 보존하고 수집해온 자료들을 모아둔 리코르디의 아카이브를 이탈리아어로는 ‘아카이보 스토리코 리코르디’(Archivio Storico Ricordi)라고 한다. 이 아카이브는 이탈리아 밀라노의 브레라 궁전 내에 있다. 브레라 궁전의 미술관은 바티칸 박물관, 피렌체의 우피치와 함께 이탈리아 3대 미술관 중 하나로 꼽힌다. 14세기에 지어진 고색창연한 건물은 오늘날에도 매우 유용하게 활용되고 있다. 브레라 궁전에는 도서관과 미술관, 국립미술학교 등이 함께 있어 입구를 지나 조소작품이 즐비한 중정에 들어서면서부터 예술적 향취가 진하게 느껴진다.

브레라 궁전은 상당히 크고 복잡해서 안내를 받고 따라 들어가는 길이 어디가 어딘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미로 같은 복도와 수많은 고서로 채워진 도서관을 지난 끝에 브레라 궁전 안쪽에 오롯이 자리 잡고 있는 리코르디 아카이브를 만날 수 있었다. 오랜 역사와 명성을 지닌 이 아카이브는 단독 건물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었고 규모도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아카이브 직원들이 근무하는 사무실 역시 적은 인원으로 구성이 단출해서 그 많다는 자료들의 보관과 관리가 어떻게 이뤄질까 하는 궁금증이 들었지만 사무실 한 가운데 놓여있는 유리 상자 안을 들여다보는 순간 다른 생각들은 모두 지워졌다. 유리 상자 안에는 푸치니의 유작 오페라 ‘투란도트’의 자필 악보가 놓여 있었다.


푸치니 '투란도트' 악보 마지막 부분
푸치니 오페라 ‘투란도트’ 악보 마지막 부분./사진=손수연
그의 모습을 촬영한 수많은 사진에서 알 수 있듯이, 작곡가 푸치니는 지독한 애연가였다. 그 영향인지, 만년에 그는 후두암 증상으로 목에 생긴 종양을 떼기 위해 1924년 브뤼셀에 갔다가 그곳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당시 그는 오페라 ‘투란도트’를 작곡 중이었다. 푸치니는 오페라에서 칼라프 왕자의 몸종 류가 자결하는 장면까지 작곡을 마치고 수술을 받기 위해 기차를 타고 브뤼셀로 떠났다.

아마도 그는 돌아와서 오페라를 완성할 요량이었을 것이다.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하우스와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푸치니가 하루라도 빨리 중국을 소재로 한 이 독특한 오페라를 완성해 무대에 올리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돌아오지 못했고, 오페라도 거기서 멈출 수밖에 없었다.

훗날 제자 알파노가 나머지 부분을 마무리해 공연이 시작되긴 했지만 이 작품에 푸치니의 마지막 손길이 매우 아쉬운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투란도트’ 초연된 그날처럼 푸치니가 작곡한 곳까지 공연하고 끝내버리거나, 연출에 따라 다른 결말을 시도하기도 한다. 필자가 밀라노에 오기 전 감상한 토리노 왕립 오페라극장의 ‘투란도트’ 역시 류의 죽음으로 끝을 맺었다.

그런 사연을 가진 ‘투란도트’ 원본 악보 마지막 페이지가 리코르디 아카이브 사무실 한 복판에 펼쳐져 있는 것이다. 악보에는 푸치니의 담뱃진이 묻어있었고, 그가 흘린 커피 얼룩도 있었다. 상당히 지저분한 악보였지만 위대한 작곡가의 안타까운 미완성 유작을 직접 보게 되는 감흥은 남달랐다.


꼼꼼히 정리된 편지 묶음책
꼼꼼히 정리된 편지 묶음책./사진=손수연
벅찬 마음을 안고 들어간 리코르디의 자료실은 근대에서 현대까지 이르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보고였다. 당시 공연된 오페라의 자필 악보 혹은 리코르디와 출판계약을 맺은 악보집, 무대스케치, 무대의상 디자인과 원단샘플 등 그 방대함에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엄청난 자료를 설명하는 또 다른 기록들, 관련 저작들, 리코르디 출판사나 오페라와 관련된 수천통의 편지는 물론 명함 한 장도 소홀히 하지 않고 보관해 둔 치밀함과 꼼꼼함에 경외심마저 들었다.

현재 이 모든 유산들을 관리하고 있는 리코르디 아카이브 측의 자세 또한 놀랍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든 자료들은 방습과 항온이 유지되는 보관실에 보관되며, 일련번호와 같은 자료의 목록 정리가 매우 세심하고 빈틈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자료들은 책임 학예사가 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스레 보여줬는데, 모든 소장품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던 그녀는 푸치니가 암호처럼 흘려 써서 도저히 알아볼 수 없는 편지의 내용조차 줄줄 읽어가며 설명해 이곳의 관리와 연구가 얼마나 잘 이뤄지고 있는지 짐작하게 했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베르디의 명함이었다. 베르디는 오로지 자신의 이름 주세페 베르디라고만 쓰인 명함(직책이나 직함, 주소 등에 대한 아무런 소개 없이 오직 이름자로서 스스로를 알리는 능력과 당당함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될 것인가!)을 사용했다. 고향 근처 산타가타의 농장에서 지내던 베르디는 늘 머무는 밀라노 그랜드호텔에 도착하자 명함에 ‘도착’이라는 글자만을 써서 카사 리코르디로 보낸다. 자신의 도착을 간결하고도 카리스마 넘치게 알린 명함 한 장으로 거장 베르디의 풍모를 엿볼 수 있다.


베르디의 명함
베르디의 명함./사진=손수연
반면 미국 뉴욕에서 줄리오 리코르디에게 써 보낸 푸치니의 편지는 베르디와 전혀 다른 그의 성격을 알 수 있게 한다. 악필이지만 앞, 뒷장을 꼼꼼히 메운 편지에는 뉴욕에서의 오페라 공연 상황과 자신이 뉴욕에서 얼마나 환대를 받았는지, 작품에 대한 반응은 얼마나 열광적인지 등등에 관한 사연이 구구절절 소상히 쓰여 있다. 또한 앞서 언급한 것처럼 자유분방하게 작곡과 기보를 한 푸치니와는 달리 베르디의 자필 악보는 그 자체로 바로 연주가 가능할 정도로 깔끔하고 엄격하게 정리가 돼 있다. 작품세계 만큼이나 상이한 두 작곡가의 성품과 개성을 이처럼 카사 리코르디가 소중하게 보관해온 자료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이밖에도 한 폭의 수채화처럼 아름다운 베르디와 푸치니 작품의 초연 무대 스케치들, 의상과 소품을 그림으로 정리한 목록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다. 사진이 없던 시절에 소품용 머리핀이나 귀걸이 한 짝까지 그림으로 남기고 번호를 매겨둠으로써 어떤 오페라의 어느 장면에서 사용됐는지 바로 찾아볼 수 있게 한 것은 200년 전 오페라를 오늘날 그대로 재현하고 고증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

또한 카사 리코르디와 함께 작업했던 수많은 작곡가, 대본가, 지휘자, 성악가, 무대스태프 등의 임금 지급과 관련된 계약서와 장부는 당대 문화산업으로서 오페라가 차지하는 비중을 연구할 수 있게 해주는 귀한 자료이다. 리코르디는 오페라에서 러닝 개런티 개념을 최초로 도입한 출판사다. 베르디를 시작으로 작곡가들은 리코르디로부터 오페라 작곡료만 받은 것이 아니라 흥행에 따른 러닝 개런티도 받았다. 이 역시 카사 리코르디의 장부에 남아있는 기록이다.


베르디 '나부코'  자필악보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부분
베르디 오페라 ‘나부코’ 자필악보 중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 부분./사진=손수연
이날 세 시간 남짓 리코르디 아카이브에 머물면서 오페라를 연구하고 비평하는 사람으로 느낀 감동을 이루 다 말하기는 어렵다. 그것은 오페라 예술의 거대한 축으로 인식되는 이탈리아 오페라의 보물창고에 들어가 그 보물들을 직접 확인한 감격이기도 했고, 이처럼 오래된 자료들 사이에서 오페라가 박제가 된 유물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살아있는 예술이라는 것을 목격한 것에 대한 뿌듯함이기도 했다.

리코르디 아카이브가 연구를 거듭하면서 보존하고 있는 자료를 바탕으로 오늘의 이탈리아 오페라는 발전하고 있다. 글자 그대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이 실현되는 사례다. 리코르디 아카이브의 소장 자료들은 사실 이탈리아 오페라뿐 아니라 전 세계 오페라에 두루 영향을 미치는 존재들이다. 그렇다면 현재 전 세계 오페라 역시 리코르디의 유산을 밑거름 삼아 새롭게 나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오페라 역사의 위대하고도 찬란한 유산은 지금도 살아 숨 쉬고 있다.

/손수연 오페라 평론가, 상명대 초빙교수(yonu4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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