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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추기경의 고뇌

[칼럼] 추기경의 고뇌

기사승인 2018. 04. 11. 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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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변호사 사진
이 우 근 (법무법인 충정 고문 / 숙명여대 석좌교수)
봄은 파릇한 새싹과 함께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탄생한 계절이다. 1969년 3월 교황 바오로 6세는 서울 대교구장 김수환 대주교를 추기경으로 서임(敍任)했다. 초대교회의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이름을 자신의 세례명으로 삼은 김 추기경은 서임 이후 은퇴할 때까지 줄곧 고뇌의 세월을 보내야했다. 엄혹한 권위주의 통치 시절, 자유와 인권의 쇠퇴를 고뇌하던 그는 명동성당과 더불어 민주화운동의 상징으로 떠오른다.

국가비상사태 선포로 암울했던 1971년 크리스마스이브, 김 추기경은 자정 미사 강론에서 비상대권을 틀어쥔 권력자를 향해 강력한 경고의 메시지를 던진다. “대통령의 막강한 권력은 이 땅의 평화에 해를 끼칠 것입니다.” 굴절된 역사의 고비마다 올곧은 시대정신을 제시해온 추기경은 ‘역사적 현실에 동참하는 교회’를 앞장서 이끌었다. 그는 광장에서 촛불을 치켜들거나 거리에서 구호를 외친 적이 없었지만, 그 자신이 어두운 시대를 밝힌 촛불이었고 적막한 사회를 일깨운 광야의 울림이었다.

김 추기경은 민주화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간곡히 당부했다. “정의를 위해 싸우면서 미움만 남아 있지 않은지 우리는 반성해야 합니다.” 증오를 민주화투쟁의 동력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충고였다. 그 시절을 추기경은 이렇게 회고했다. “나는 진보니 좌경이니 하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 그래서 약자라고 불리는 사람들 편에서 그들의 존엄성을 지켜주려 했을 뿐입니다.” 추기경의 목소리는 분노의 고함이 아니라 사랑의 호소였다.

12·12사태 후 권력을 한 손에 거머쥔 실세 군인이 인사를 드린답시고 찾아오자 김 추기경은 서릿발 같은 농담 한 마디로 그의 입을 막아버렸다고 한다. “서부활극 같더군요. 서부영화에선 총을 먼저 뺀 사람이 이기잖아요.” 웃음 속에 비수를 꽂아 넣은 촌철살인이 사제복을 입은 성직자다워 보이지 않았지만, 그 사제답지 않음이 도리어 그를 진정한 성직자로 존경받게 만들었다.

김 추기경에게 고뇌를 안긴 것은 그러나 독재정권만이 아니었다. ‘반미·친북으로 가는 것은 위험하다.’ ‘국가보안법 폐지에 반대한다.’ ‘전교조가 국가관·인간관을 잘 교육시켰다고 보기 힘들다.’ ‘자유와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지 않는 통일은 단호히 반대한다.’ 추기경이 자기의 소신을 밝히자, 이제껏 그를 민주화의 상징으로 떠받들던 사람들이 추기경을 향해 온갖 비방을 쏟아냈다. ‘배신자, 수구꼴통, 친일파….’ 정의를 구현한다는 어떤 사제들은 추기경을 시대착오자로 몰아붙이기도 했다. 그러나 입으로는 정의를 외치면서 몸으로는 여신도를 욕정의 노리개로 삼아온 위선자들은 사제라는 이름을 김 추기경과 공유할 자격이 없다.

김 추기경은 무슨 ‘운동’을 한 것이 아니었다. 어느 정파를 대변한 것도 아니었다. 자신의 말 그대로 가난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 사회적 약자들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사제에게 맡겨진 본분을 성실히 수행했을 따름이다. 지난날에 얽매일 때는 앞날을 밝혀주고 미래의 환상에 빠질 때는 과거를 되새겨주며, 극우로 기울면 왼편을 지탱해주고 극좌로 치달으면 오른편을 북돋워주면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예수의 가르침에 충실했던 사제, 그는 오늘날 우리가 몹시도 아쉬워하는 나라의 어른이자 정신적 스승이었다. 추기경은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데 70년이 걸렸다”고 말했지만, 그의 사랑은 가슴에서 멈추지 않았다. 추기경의 사랑은 가슴에서 다시 손과 발로 내려와 온몸 구석구석까지 퍼져나갔다. 선종(善終) 후 그의 각막이 눈먼 이에게 이식되었듯이….

“서로 사랑하세요”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영원의 세계에 들어간 추기경의 묘비에는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라는 자신의 사목표어가 새겨져있다. 십자가 처형을 앞둔 예수가 제자들에게 마지막 만찬을 베풀며 남긴 말씀으로 전해진다. 서로 사랑하기는커녕 적폐청산·남북관계·지방선거 등을 둘러싸고 증오의 칼바람과 분노의 맞바람이 거칠게 부딪치는 이즈음, 김수환 추기경의 영혼은 서임 후 마흔아홉 번째 봄을 맞는 지금도 ‘우리와 모든 이를 위하여’ 깊은 고뇌에 잠겨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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