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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영화 ‘더 포스트’, 아이러니와 역설

[칼럼] 영화 ‘더 포스트’, 아이러니와 역설

기사승인 2018. 04. 11.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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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미국이 베트남 참전을 본격화한 계기가 된 1964년의 통킹만 사건은 조작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1971년 미 국방부 펜타곤 보고서에 정확히 기록돼 있다. 그리고 1995년에 베트남전 당시 국방장관인 로버트 맥나마라가 회고록에서 이 사실을 고백함으로써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전쟁터였던 베트남은 물론 미국 및 많은 참전국들이 입은 인명 피해를 생각하면 이 같은 사실은 말을 잊게 한다. 백번 양보해 아무리 정치적으로 전쟁 명분이 필요했던 냉전시대 대리전이라고 해도 전쟁의 확전이 조작된 사건에 의해 촉발됐다는 사실은 어처구니없는 일이다. 글자 그대로 ‘어처구니(맷돌 손잡이) 없는’ 상황은 아이러니를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전쟁이라는 맷돌은 그 속에 빨려든 인명들의 살과 뼈를 갈아대고 피를 짜내지만 정작 맷돌을 돌리는 ‘어처구니’는 아예 없었다. 전쟁이 전쟁을 위해 스스로 맷돌을 돌렸던 것이다.

베트남은 미국과의 전쟁을 끝낸 후에도 이웃나라인 캄보디아와 전쟁을 치러야 했다. 냉전체제의 대리전 성격의 베트남-캄보디아전쟁도 1991년 파리협정에 가서야 종식된다. 그런데 베트남은 캄보디아와의 전쟁 중에 또다시 중국과 국경분쟁 때문에 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세력과 세력이 부딪히는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전쟁이 빈번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해도 참으로 기구한 민족이다. 역설적으론 자존감이 높고 생명력이 강한 민족이라는 생각에 경외감이 들기도 한다.

진짜로 역설적인 것은 지금 미국과 베트남은 경제·군사적으로 매우 돈독한 동맹관계라는 점이다. 미국의 인도차이나 반도 세력 장악을 온몸으로 막아냈던 베트남은 이젠 중국의 인도차이나 반도를 통한 남방 진출을 제지해야 하는 입장에 놓이게 됐다.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역사라는 흐름은 그러한 아이러니가 만들어낸 ‘지독한 패러독스’의 흔적들인 것이다.

전쟁범죄에 대한 일본의 태도에 관한 우리 감정을 되돌아볼 때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베트남 양민학살에 대한 깊은 사죄는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베트남 국민들을 위로하고 지나간 역사 속의 우리 치부를 치유하는 그나마 빠른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역사라는 이름의 숭고한 우물을 우리의 모순된 행동으로 인해 빠져나올 수 없는 늪으로 만들고야 마는 일은 피해야 하지 않겠는가? 맹자의 말씀대로 옳고 그름을 가리기 전에 먼저 연민과 부끄러움, 사양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런 마음조차 가질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아이러니한 존재들이다. 분명한 것은 아이러니를 직시할 때 역설적으로 진실은 성큼 다가온다.

수사학에서 아이러니와 역설은 떼어서 설명할 수 없다. “모든 아이러니의 목적은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고, 오히려 상반된 언급을 통해서 어떤 진실을 드러내거나,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에 주목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 아이러니를 통해 역설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역설을 통해 아이러니한 상황이 만들어진다. 수사학의 입장에서 각기 달리 해석될 수 있지만, 무엇이 선행되든 진실을 드러내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아이러니와 역설은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표현 수단임에는 분명하다.

명분 없는 베트남 전쟁의 실상을 고발한 미국의 유력지인 뉴욕 타임스의 특종, 그리고 이어진 정부의 언론탄압으로 언로가 막힌 상황에서 지역의 작은 신문사인 워싱턴 포스트가 더 큰 특종을 냈다는 사실을 영화 ‘더 포스트’가 소재로 삼고자 했을 때, 소위 경쟁 관계의 프레임에서 그려질 수도 있다. 그러나 ‘더 포스트’는 그런 선택보다 국가의 폭력 앞에서 선, 워싱턴 포스트의 사주 캐서린과 편집장 벤의 선택에 집중한다.

그들의 선택은 신문사의 존립 자체를 위태롭게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선택했으며 뉴욕타임스에 이어 특종을 내놓은 워싱턴 포스트의 지면은 결과적으로 특종경쟁 프레임을 넘어 도미노처럼 연쇄적인 방식으로 실현된 연대의 장이 됐다. 다시 말해서 경쟁을 통해 진실에 다가갔다. 이러한 릴레이게임과 같은 선형적 연대는 아이러니한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지난주 KBS의 천안함 사건에 대한 진실공방에 대해서도 언론들이 ‘경쟁적 연대’라는 방식을 통해 진실을 향한 ‘선형적 연대’의 실천으로 실체에 다가갔으면 좋겠다. 세월호도 마찬가지고, 그 밖에 진실을 밝혀야 할 사건들이 많은 듯싶다.

우린 지금까지 ‘어처구니없는 시대’를 통과했다. 이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극장 안 관객과 같이 무기력하고 아이러니한 존재들이었음이 명백하다. 부끄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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