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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북정상회담, 이산가족의 놓지 않는 희망…“죽기 전에 헤어진 가족 소식만이라도”

남북정상회담, 이산가족의 놓지 않는 희망…“죽기 전에 헤어진 가족 소식만이라도”

기사승인 2018. 04. 24.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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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상봉 이뤄질까<YONHAP NO-2338>
지난 10일 오전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이비스 앰배서더에서 대한적십자사와 통일부 주관으로 열린 ‘미상봉 이산가족 초청행사’에 참석한 가족들이 행사 전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연합
“통일, 아니 가족상봉까지도 바라지 않아요. 죽기 전에 북에 있는 가족 소식만이라도 듣는 게 저의 소원이에요.”

4·27 남북정상회담을 사흘 앞둔 24일 이산의 한을 품고 살아온 김모 할아버지(82)는 눈을 감은 채 북한에 두고 온 가족 생각을 떠올리며 이같이 말했다.

김 할아버지는 “할머니가 고향을 떠나지 못해 어머니와 동생들이 함께 북한에 남아있었다”며 “그때가 마지막인 줄 알았으면 목숨 걸고 가족들을 끌고 나왔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가족과 헤어진 지 68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고향인 황해북도 개풍군에 남겨진 할머니, 어머니와 동생들의 모습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김 할아버지는 5남매 중 둘째로 당시 나이 14살이었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이듬해 1·4 후퇴 당시 인민군의 징집을 피해 김 할아버지는 아버지, 형(당시 17)과 함께 남한으로 내려왔다.

그는 “당시 고향이 접전지역이라 군인들이 오가는 경우가 많았고 한 달 정도가 지나면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거로 생각했다”면서 “결국 가족들을 두고 도망 온 꼴이 돼버렸다”고 말했다.

김 할아버지는 피난 온 뒤 헤어진 가족들을 가슴에 묻으며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해왔다. 미군 하우스보이 생활을 하며 힘든 나날을 보냈지만, 가족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못했다.

그는 “중학교 시절 홀로 지내면서 너무 힘들었다. 한창 젊은 시절, 어려운 상황에서 가족들이 너무 보고 싶었다”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김 할아버지는 40여년 전 지인으로부터 가족들의 생사 소식을 접했지만 그 이후 현재까지 다시 듣지 못하고 있다.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은 김 할아버지는 2000년부터 수차례 이산가족 상봉을 신청했다. 하지만 그는 20차례 진행된 이산가족상봉 명단에 이름이 한 차례도 올라가지 못했고 고향에 남겨진 가족들의 소식조차 듣지 못했다.

김 할아버지는 “헤어질 당시 어머니가 막냇동생을 임신 중이었다. 동생들이 잘 커서 어떻게 살고 있는지,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는지, 소식이 너무 궁금하다”고 하소연했다.

이어 “헤어지고 아무것도 모른 채 68년간 이렇게 살아왔는데 소식조차 모른다는 게 말이 되나”고 토로했다.

김 할아버지는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기대와 바람을 나타냈다. 그는 “그동안 열린 남북정상회담에선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최근 남북관계를 보면 ‘이번은 조금 다르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기대감이 높아진다”며 “이제 많은 것도 바라지 않는다. 그저 엽서 한 장 보내며 헤어진 가족들에 대한 최소한의 소식이라도 듣는 게 마지막 소원”이라고 바람을 전했다.

그는 인터뷰 마지막까지도 북한에 있는 가족에 대해 걱정을 이어갔다. 김 할아버지는 “혹시 이 소식으로 인해 이북에 있는 가족들이 피해받을까 봐 걱정이 된다”며 “그저 북한에 있는 가족들이 건강하게 잘 살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가족들의 한을 후세들이 기억하고 그들의 마음을 지켜주길 소망했다. 김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형은 이미 돌아가셨고 이제 나만 남았다”며 “이산가족이 고령화돼서 거의 다 세상을 떠나 고향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마지막 세대일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통일부에 따르면 지난달 기준 80세 이상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는 3만7198명으로 전체 생존자 중 64.2%를 차지한다. 또 전체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13만1531명 중 7만3611명(56%)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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