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칼럼]신화와 현실 사이,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

[칼럼]신화와 현실 사이,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

기사승인 2018. 05. 21. 10:10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2018011401010010683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환경문제에 관한 영화 중 잘 알려진 작품으로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에린 브로코비치’가 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주인공 에린 브로코비치는 변호사 사무실의 말단 사무원으로, 미국 최대 규모의 환경 소송사건을 이끌고 마침내 승리한다. 화려한 로펌을 동원한 거대기업 PG&E와의 법적분쟁을 600여명의 고소인을 대리해 열정적으로 싸운 끝에 쟁취한 값진 결과였다. 확정 선고된 1993년 당시 천문학적 규모인 3억3300만달러(3603억여원)의 배상을 이끌어낸 환경 소송 역사에 획을 그은 사건이었다.

컬럼비아 소니 픽처스가 제작하고 스티븐 소더버그가 메가폰을 잡은 이 작품은 2001년 아카데미상 5개 부문에 노미네이트 됐으며 주인공 역을 맡은 줄리아 로버츠는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사실 미국의 영화제작사 입장에서 이보다 더 좋은 영화적 소재는 없다. 무력해 보이는 한 인물이 거대괴물(조직)을 상대해 이겨낸다는 설정은 서구의 가치관에 부합하는 스토리텔링이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의 다윗과 골리앗의 설정이 대표적이다. 최근엔 평소 나약해 보이기까지 평범한 청년이 슈퍼히어로가 돼 악으로부터 도시를 구하고, 나아가 세계를 구원하는 스파이더맨 등이 있다. 이러한 신화는 미국이라는 사회를 유지하는 동력인 아메리칸 드림의 연장선 위에 있다.

실제 사건이 있었던 1992년이나 제작연도인 1999년이라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해 보면, 아이 셋 딸린 이혼녀로 미인대회 출신이라는 경력 이외에 변변한 능력도 없던 일개 사무보조원이 거대기업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은 실로 놀라운 일임이 분명하다. 전력사업을 하는 PG&E의 공장에서 유출하는 크롬 성분이 수질을 오염시켜 지역민들을 병들게 한다는 사실을 우연히 인지한 주인공 에린은 특유의 집념으로 거대괴물의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 주인공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600여명의 고소인들은 정당한 보상을 받고, 책임이 분명한 PG&E는 패소하고 엄청난 경제적 손실을 맞게 된다. 사필귀정이다.

그런데 실상은 좀 다른 듯하다. 1905년 설립된 PG&E는 미국 서부의 태평양 지역에 산재해 있던 여러 전기 및 가스 업체들을 합병하며 성장한 거대기업이다. 자료에 의하면 PG&E는 1990년대 에너지 생산업체로부터 구매하는 전기의 매입가와 일반 소비자에게 공급되는 전력의 판매가 조정에 실패하면서 2001년 파산신청을 접수했다가 2004년 기사회생에 성공한다. 영화가 제작되고 발표된 시점과 묘하게 겹친다.

결과적으로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는 방만한 경영으로 파산한 거대기업 PG&E가 환경운동가와의 법정싸움에서 졌다는 이미지를 심어 주게 됐다. 적어도 주주들에게 공공의 적이 내부가 아닌 외부에 있다는 인상을 주기엔 충분했다. 이러한 경영의 무능력이 아니었다면 채권단은 환경문제에 대해 각성하고 환골탈태한 거대기업 PG&E에게 회생의 기회를 주는 데 주저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화 이면의 숨겨진 현실이다.

보도에 의하면 2017년 10월에 있었던 미국 캘리포니아 대화재의 원인은 PG&E의 전력공급 송전선의 노후로 인한 누전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PG&E는 산불의 원인을 ‘기후변화’로 돌리는 등 언론과 정치권에 로비를 하고 기업의 이미지 개선에만 집중하는 듯하다. 정작 재투자 해야 할 기반설비의 정비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던 것일까? 뉴스에 의하면 PG&E는 엄청난 규모의 지역의 산불피해에 대해 300만달러(32억여원)를 지원했다고 한다. 그런데 해당연도 PG&E 임원들에 스톡옵션 및 보너스 등 임금 인상분이 900만달러(97억여원)에 이른다고 전해진다.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다.

사실상 거대괴물을 상대로 한 싸움은 한 사람만의 각성에 의해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우리는 그간 삼성 반도체 사건을 보며 남의 일 대하듯 했다. 그러다 옥시 가습기 사태로 급기야 나의 일이 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오늘 우리 사회는 이온이 방출된다는 침대에서 라돈 방사능이 검출되었다는 사건을 접하고 있다. 더욱 기가 차는 것은 기업과 정부가 책임을 떠넘기는 공방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더 이상 반복돼서는 안 된다.

과학 문명의 폭발적 발전으로 환경이 바뀌어 간다. 국회와 정부, 기업이 빠른 대처와 장기적인 전략을 모색할 때다. 사법 권력도 전향적인 판결을 해야 한다. 안일한 태도로 일관했다간 급속도로 바뀐 미디어 환경으로 다변화된 민심이 어떻게 요동칠지 모른다. 이제 영웅적인 한 명의 에린 브로코비치는 없다. 작금의 에린 브로코비치는 다중으로서 각성된 시민들의 이름이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