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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자 편에서 기득권 맞서…“노회찬, 진보 큰 별 졌다” 추모 잇따라

노동자 편에서 기득권 맞서…“노회찬, 진보 큰 별 졌다” 추모 잇따라

기사승인 2018. 07. 23.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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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정의당 제공
“진보의 큰 별이 지다.”

노회찬 정의당 원내대표(62)의 23일 타계 소식에 당 홈페이지에는 당원들의 안타까움이 녹아있는 추모 글이 잇달아 올라왔다. 노 원내대표는 명실공히 한국 진보정치의 간판스타였다. 민주노동당과 정의당 등 소수정당인 진보정당에 몸담은 고인은 날카로운 논평과 재치 있는 비유로 ‘진보정치의 아이콘’으로 불렸다. 최근 정의당 3기 원내대표로 활동을 시작한 노 원내대표는 시사교양 프로그램에서 대중친화적인 언변을 통해 당 인지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56년 부산에서 태어난 노 원내대표는 경기고 재학시절부터 유신 반대투쟁에 참여하는 등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았다. 26살 때인 1982년 영등포 청소년 직업학교에서 전기용접기능사 2급 자격을 따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고인은 종종 20대에 용접공으로 현장노동자와 땀 흘리며 노동운동을 하던 시절을 회고했다.

노 원내대표는 2004년 총선에서 민주노동당 비례대표로 당선돼 17대 국회에 입성했다. 그는 민노당 내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주의) 갈등으로 노선 갈등이 불거지면서 탈당해 진보신당 초기 공동대표를 지냈다. 이후 통합진보당 창당에 합류했다가 비례대표 부정경선 파문을 겪으면서 정의당을 창당했다.

노동자·서민의 편에서 기득권에 항고한 노 원내대표의 투사적인 면모는 ‘삼성 엑스(X) 파일’ 사건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는 19대 국회 당시 국가정보원 불법도청 테이프에서 삼성그룹 ‘떡값’을 받은 전·현직 검사 7명의 실명을 공개한 혐의로 유죄를 받아 국회의원직을 잃었다.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20대 총선에서 경남 창원 성산구에 출마해 3선에 성공했다. 심상정 의원과 함께 진보정당 첫 3선 의원이라는 기록을 세웠다. 또 정의당에서 활동하면서 지지율을 10%까지 끌어올리는 데 공을 세웠다.

노회찬 의원 빈소 최석 정의당 대변인9
아시아투데이 정재훈 기자 = 최석 정의당 대변인이 23일 오후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노회찬 의원 빈소 앞에서 정의당 대표단 긴급회의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50년된 불판 갈아야 한다” ‘정치사이다’ 어록 수두룩

대중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재치 있는 화법으로 사랑을 받은 고인의 어록도 눈길을 끈다. 노 원내대표는 17대 총선 당시 한 토론회에서 “한나라당, 민주당 의원님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퇴장하십시오. 50년 동안 삼겹살을 같은 불판 위에서 구워 먹으면 고기가 새카맣게 타 버립니다. 이제 불판을 갈 때가 왔습니다”고 언급하면서 정치 혁신을 주창했다.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 신설에 반대하는 한국당을 향해선 “동네에 파출소 생긴다니까 동네에 폭력배들, 우범자들이 싫어하는 거나 똑 같은 거죠”라고 언급해 화제가 됐다.

소수정당에 몸담았지만 노 원내대표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컸다. 촌철살인의 언변 덕분이지만 무엇보다 고인이 살아온 인생 그 자체가 보여준 진실성 때문이었다. 노 원내대표는 슬하에 자녀가 없다. 공식적으로는 수감 생활로 인해 아이를 가질 때를 놓쳤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를 잘 아는 인사들은 운동권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아이를 갖지 않은 것이라고 말했다.

고인과 인연이 깊은 한 정치평론가는 “노 원내대표는 온 몸으로 PD를 실천하신 분”이라고 표현했다. 노 원내대표는 최근 의원 특권 내려놓기의 하나로 국회 특수활동비 폐지를 주장하면서 특활비를 반납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노 원내대표는 여야 5당 방미 원내대표들과 투신 전날 밤까지 술을 마시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공교롭게 미국에서 술잔을 기울인 원내대표 5명 중 3명(노회찬·홍영표·김성태)이 용접공 자격을 갖고 있었다. 세 명의 원내대표들은 민주화의 열망이 분출하던 격동의 1980년을 돌아봤다고 한다. 그 순간 노 원내대표는 노동운동과 함께했던 자신의 20대 시절과 진보정치, 책임에 대한 상념에 젖었을 것이다.

그의 유서에도 책임지는 정치에 대한 고민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정의당이 이날 공개한 유서 일부에는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며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고 적혔다. 그는 또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고 당원들에게 당부했다.

노 원내대표의 카카오톡 프로필에는 미소짓는 고인의 모습과 함께 ‘자유인, 문화인, 평화인’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고인의 모교인 경기고 교훈이다. 고인이 평화로운 그곳에서 그가 꿈꾸는 문화와 자유가 꽃피는 진보 정치를 펼치길 진심으로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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