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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노회찬의 ‘권력의지’

[칼럼] 노회찬의 ‘권력의지’

기사승인 2018. 07. 24.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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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개인적으로 그를 알지 못한다. 우연한 기회에 그의 강연을 들으면서 그에게 매력을 느꼈던 기억이 있다. 특유의 입담과 해학은 어렴풋이 이미지로만 남아있고, 오히려 또렷이 기억되는 것은 어떤 청중의 도발적인 질문에 대한 단호한 그의 대답이었다. 그 청중의 질문을 요약하면 ‘결국 정치인은 권력을 추구하는 집단이고, 운동권 출신 정치인들은 그런 기질이 젊은 시절부터 내면화된 사람들이 아니냐는 것’이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듣기에 따라 매우 불편한 시니컬한 질문이었다. 질문에 대한 그의 반응은 의외였다. 예의 미소 띤 표정도 가시고 그는 단호하게 “예! 저는 그런 사람입니다. 저의 ‘권력의지’를 숨길 이유가 없습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저는 확고한 권력의지로서 집권에 대한 큰 꿈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를 두 번째 만난 것은 2016년 12월 촛불시위가 한창일 당시 광화문 광장에서였다. 무대 앞에서 서너 번째 줄에 그가 앉아있었다. 필자의 뒷줄이었다. 뒤를 돌아다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쳤다. 조명 탓인지 용접공이 가질법한 구릿빛 얼굴이었다. 그의 표정은 상기되고 경직돼 있었고 평소 매체를 통해보던 하회탈 같은 미소를 머금은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그래서인지 악수라도 청해보고 싶은 마음은 두터운 장갑 밖으로 나올 줄 몰랐다. 그렇게 그와의 조우는 나만의 추억으로 남겨지고 말았다. 군중 속에서 호흡을 같은 한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때 본 그의 이미지는 엄숙함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대통령을 탄핵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게 한 정치권의 일원으로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을 것이고, 예의 그 밝은 표정으로 집회를 참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매체를 통해 그를 보지 않았고 자연인과 자연인으로 그와의 만남만을 기억에 담고 있다면 그의 인상은 무겁고 다가서기 어려운 사람이었을 것 같다. 그러나 그는 국회에서 혹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정치를 쉽게 이해시켜줬으며 상식이 무엇인지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 비유라는 친절한 수사를 통해 정치가 멀리 있는 대단한 무엇이 아니라 삼겹살집에부터 외과의 수술대에 이르기까지 우리 인생의 궤적과 일상 속 공간과 사물에 녹아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줬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그가 세상을 등지기 두 시간 전쯤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에서 발표된 여론조사에 의하면 그가 소속된 정의당의 지지율이 10%대를 넘었으며 이러한 추세라면 정의당의 제 1야당이 될 수도 있다는 조심스런 예측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이해하고 있었던 정치인 노회찬은 본인이 소속된 정당이 집권여당이 되고, 그 집권여당의 수장을 넘어서 국가를 이끄는 지도자가 되면 나라를 진보적인 방향으로 이끌어 보고자 하는 강한 권력의지를 가진 인물이다. 그의 입장에선 소속 당이 제 1의 야당이 된다는 건 다음 단계에서 집권여당을 꿈꿀 수 있는 출발점에 서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선택했다. 비극적 선택은 딜레마에 빠졌을 때 나오는 극단적 행동이다. 나의 오점이 드러나 내가 소속된 집단을 위기에 빠트리기보다는 내가 죽음으로써 집단의 미래를 도모하고자 함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개인의 종말은 우주의 종말이라는 필자의 기본적인 생각에 비춰 보았을 때 고인은 하지 말았어야할 선택을 한 것이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갈망한 삶을 살아온 고인의 선택을 폄훼하고자 함은 아니다. 다만 고인이 평소 사용했던 권력의지의 근본적 의미를 한번 만 더 상기했으면 하는 아쉬움에서 하는 소리다. 세속정치에서 사용하는 권력의지는 본래 ‘생의 의지’를 의미한다. 정치인 노회찬의 평소 언행 역시 생을 긍정하는 같은 맥락에서 이해돼야만 한다.

개인의 행동양식으로 열등감을 극복하고자하는 ‘보상욕구’로서 권력의지에 대한 심리학적 입장보다 보다 근본적이고 철학적 개념으로서의 ‘권력에의 의지’는 보다 리버럴(자유주의적)하다. 권력의지의 본래 의미는 정치적 욕망과 같은 ‘대상에 대한 지배적 권력’을 추구하는 개인의 행동양식을 의미하기보다 삶을 긍정하고 노예의 도덕을 폐하고 생을 주체로서 온전히 주인이 돼 살아갈 것을 주문하는 니체의 생철학에 기초한다. 지금여기를 긍정하는, 삶이 고단하고 힘들지라도 내가 주인이 될 수 있다면 영겁을 반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 ‘권력에의 의지’인 것이다. 필자가 바라본 정치인 노회찬은 그와 같은 삶을 살았던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수수 사실을 부정한 한 번의 거짓말로 온전히 그간의 삶이 부정당하고 스스로 양심의 노예가 돼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자연인으로서 노회찬이 끔찍하게 생각한 것은 금전 수수라는 실수보다 실수를 덥기 위한 거짓말이었던 것이다.

미래의 지도자를 잃어버린 것 같아 너무나도 아쉽다. 정치인 노회찬은 죽었다. 하지만 그의 권력의지는 죽지 않았다. 그의 권력의지를 실현할 노회찬의 확장된 정체성은 온전히 정의당 몫이 됐다. 상주로서 그의 빈소를 지키는 모든 정의당원들에게 위로를 전하며 고인의 영면을 위해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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