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투데이 로고
3차례 총리, 5차례 핵실험, 경제성장 이끈 인도 전 총리 별세

3차례 총리, 5차례 핵실험, 경제성장 이끈 인도 전 총리 별세

기사승인 2018. 08. 17. 00:13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톡 링크
  • 주소복사
  • 기사듣기실행 기사듣기중지
  • 글자사이즈
  • 기사프린트
바지파이 전 총리, 병원서 별세, 향년 93세
3차례 총리 역임...독립 후 첫 비(非) 콩그레스 정권
비약적 경제성장 이끌어 인도 경제대국화 초석 다져
핵실험하면서도 파키스탄 평화협상 이끌어
India Obit Vajpayee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전 인도 총리가 16일 오후(현지시간) 지병으로 입원 중이던 인도 뉴델리 전(全) 인도의료과학연구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93세다. 사진은 2004년 5월 인도 뉴델리 대통령궁 행사에서 청중하게 인사를 하는 모습./사진=AP=연합뉴스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전 인도 총리가 16일 오후(현지시간) 지병으로 입원 중이던 인도 뉴델리 전(全) 인도의료과학연구원에서 별세했다고 현지 언론과 외신이 전했다.

향년 93세의 바지파이 전 총리는 3차례 총리을 지냈다. 1990년대 후반 핵실험을 강행해 미국과 서방국가의 제재를 초래하기도 했다.

그는 2009년 뇌졸중으로 쓰려져 언어 장애를 겪고 있었고, 지난 6월 건강이 악화돼 입원했다.

◇ 3차례 인도 총리 역임...독립 후 첫 비(非) 콩그레스 정권

그는 1996년 힌두 민족주의 성향 인도국민당(BJP)을 이끌고 처음 총리가 됐다. 하지만 내부 불화로 연립정권이 붕괴돼 13일 간 총리직을 수행했다.

그러나 1998년 총선에서 승리한 뒤 다시 총리에 올랐다. 13개월 재직 후 1999년 4월 신임투표에서 패배해 정치위기를 맞았으나 9월 총선 압승, 2004년까지 집권했다.

그의 총리 재임은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후 자와할랄 네루 초대 총리부터 3대째 ‘가문(家門) 정치’를 이어온 사회주의 성향 국민회의당(INC·콩그레스)을 처음으로 대체했다는 면에서 인도 민주주의 역사에서 의미가 크다.

India Obit Vajpayee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전 인도 총리가 16일 오후(현지시간) 지병으로 입원 중이던 인도 뉴델리 전(全) 인도의료과학연구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93세다. 사진은 인도 뭄바이 학생들이 이날 바지파이 전 총리의 초상화 주변을 꽃으로 장식하는 모습./사진=뭄바이 AP=연합뉴스
◇ 비약적 경제성장 이끌어 모디 총리 추진 인도 경제대국화 초석 다져

아울러 총리 재임 기간에 시장개방·경제구조 개혁 등을 추진해 비약적인 경제성장을 이끌어 나렌드라 모디 현 총리가 추진하고 있는 인도 경제 대국화의 초석을 다졌다는 평가다.

모디 총리는 바지파이 전 총리 별세 직후 트위터에 “바지파이의 모범적인 리더십이 인도가 21세기에 강하고, 번영하면서 폭넓은 나라가 되는 데에 토대가 됐다”고 썼다.

◇ 5차례 핵실험으로 서남아시아 핵개발 경쟁 초래

하지만 그는 1998년 2번째 총리 취임 후 수주 만에 5차례에 걸친 지하 핵실험을 강행했다. 인도는 1974년 처음으로 핵실험을 했지만 평화 목적이라고 강조해왔었다.

하지만 바지파이 전 총리는 “우리는 핵무기를 누구를 향해서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하지만 우리 자신을 방어하는 데 필요가 생겼을 땐 주저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에 인접 파키스탄이 핵실험을 실시해 서남아시아가 전 세계에서 가장 핵전쟁 위협이 큰 지역이 됐다.

India Obit Vajpayee
1999년 2월 20일 아탈 비하리 바지파이 당시 인도 총리가 버스로 파키스탄 펀자브(Punjab)주 주도 라호르(Lahore) 인근 인도·파키스탄 국경 와가에서 나와즈 샤리프 총리와 악수를 하고 있다./사진=와가 AP=연합뉴스
◇ 대(對)미 친선, 대파키스탄 평화 협상

빌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은 인도의 2차 핵실험 직후 서남아시아의 안정을 위협하고 핵확산 금지라는 국제사회의 확고한 합의에 대한 도전이라며 서방국가와 함께 경제제재 조치를 내렸다.

이에 바지파이 전 총리는 막후 외교를 실시해 클린턴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선 20여년 만에 인도를 방문토록 하는 등 친미외교를 펼쳤다.

아울러 파키스탄과의 화해 물꼬도 텄다. 그는 1999년 2월 버스로 파키스탄 펀자브(Punjab)주 주도 라호르(Lahore)를 방문해 나와즈 샤리프 총리와 평화 협상을 진행했다.

이 협상을 3개월 후 양국 군 간 무력 충돌해 일시 좌초됐지만 2001년 타지마할 궁전이 있는 인도 아그라(Agra) 평화 정상회담으로 결실을 보았다.

라호르는 샤리프 총리 선조 때부터의 저택 라이윈드 궁전(Raiwind Palace)이 있는 곳으로 모디 총리도 2015년 12월 25일 이곳을 전격 방문, 샤리프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졌다.

◇ 바지파이 전 총리에 대한 평가

바지파이 전 총리는 인도 정치계에서 사랑과 존경을 받는 몇 안 되는 인물로 꼽힌다. 정적으로부터 “나쁜 당에 들어 있는 좋은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을 정도였다.

그는 유머가 넘치며 복잡한 문제를 간단하게 표현하는 연설로 청중을 사로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BJP의 우파 민족주의 성향에도 불구하고 항상 개방적인 이미지를 견지했으며 상호비방이 넘치는 인도 정치계에서 수준 높은 정치토론을 이끌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1975년 인디라 간디 총리가 비상사태를 선포했을 때 투옥된 경력도 있다. 1977∼1979년 외무장관 시절엔 파키스탄인에 대한 비자발급을 완화하고 인도 무슬림의 성지순례를 배려하는 정책을 펴는 등 진보적인 인물로도 알려졌다.

1992년에는 BJP의 지지 속에 자행된 힌두교도들의 이슬람 사원 파괴를 비난하는 등 BJP 내 극단주의자들에 대한 비판을 서슴지 않아 여러 종교인으로부터도 존경을 받았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두 딸을 입양해 키운 것으로 알려졌다.

◇ 바지파리 전 총리, 10대 때 민족봉사단(RSS) 입문...모디 총리도 RSS 출신

그는 1924년 12월 25일 인도 중앙 마드야 프라데시(Madhya Pradesh)주 괄리오르(Gwalior)에서 카스트 최상위 계급인 브라만 가문에서 태어났다. 10대인 1939년 힌두민족주의단체 민족봉사단(RSS)에 입문했다. 모디 총리도 RSS 출신이다.

바지파리 전 총리는 1951년 BJP의 전신인 인도인민연합(BJS)을 공동 창당한 후 1968년 당수가 됐다. 1980년 BJS를 모태로 한 BJP 창당을 주도, 초대 당수가 됐다.

그는 1957년부터 록 사바(하원) 10선, 라쟈 사바(상원) 2선 등 50년 동안 의정 생활을 했다.
후원하기 기사제보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