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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영화 ‘서치’, 검색의 역설

[칼럼] 영화 ‘서치’, 검색의 역설

기사승인 2018. 09. 09.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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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2018년 선댄스 영화제에서 관객상을 수상한 영화 ‘서치’가 입소문을 타고 우리나라에서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고 있다. 사실 ‘서치’의 스토리라인은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다. 실종된 딸을 찾아 나선 아버지의 집념과 가족주의적인 결말은 휴먼드라마의 정형이다. 주변인물 혹은 경찰과 같이 도움을 주는 자가 사실 진실을 은폐하려는 의도를 숨기고 있었다는 설정은 미스터리스릴러의 정석을 따르고 있다. 다만 그 형식에 있어 일반적인 영화촬영방식이 아닌 페이스타임과 같은 매체를 통해 보여 지는 주인공의 모습이 정사(shot)라면 그가 바라보는 시점 샷은 역사(reverse shot)로서 컴퓨터모니터의 화면이라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촬영보다는 화면 캡처와 같은 방식으로 추출된 자료화면(found footage)으로 대부분의 화면을 채우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에서 시선의 문제는 권력의 작동방식에 대한 메타포다. 그것은 마치 1차 세계대전의 공중전과 같이, 위에서 바라보는 자가 보여 지는 자의 생사여탈을 쥐고 있는 상황과 유사하다. 전통적인 방식에서 보는 자는 높은 위치를 점유함으로써 권력을 가진다. 따라서 보는 자의 정점은 궁극적으로 최고 권력의 위치에 올라서야 마무리된다. 욕망의 작동방식에서 절제가 불가능한 이유다. 만약 보는 자의 위치에서 조금이라도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오이디푸스처럼 스스로 눈을 찔러 자신을 유폐시켜야 한다. 20세기 영화의 작동방식은 대중들에게 그런 권력자의 위치를 영화 관람이라는 가상적 현실에서 경험하게 한다. 이로써 지배받고 있다는 사실을 은폐시키고 끊임없이 주류의 시선을 반복 학습시키는 역할을 수행해 지배이데올로기를 재생산했다. 이제 대중은 그런 봉합에서 벗어날 때가 된 것처럼 보이지만, 또다시 새로운 방식의 매체를 통한 디지털 통제시스템으로 이행되고 있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분명한 것은 기존의 관습을 전복시키고 새로운 형식을 창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서치’는 대중은 물론 평단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러한 반향은 이 영화가 4차 혁명시대의 우리네 삶의 형식을 온전히 담고 있다는 측면에서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서치’가 스토리 면에서 영화사에 획을 긋는 작품은 아니지만, 그 형식실험으로 인해 ‘서치’이전의 영화와 이후의 영화로 나눌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임엔 충분한 요소가 있다. 영화에서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도시의 일상에서 사람들이 보고, 보여 지는 방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SNS를 통해 우리는 상대를 실시간으로 바라보며 동시에 자신을 바라본다. 페이스타임과 같은 영상통화의 예와 같이 우리는 상대를 바라보지만, 그 밑에 있는 작은 화면을 통해 우리 자신을 바라본다.

많은 경우 상대를 바라보다가도 이내 자신의 모습에 표정을 달리하고 얼굴 각도를 고쳐 잡는다. 거울을 통해 자신을 바라보는 나르시시즘적 유년의 자기애와 타자라는 거울에 어떻게 비추는가가 중요한 현실에서 상징체계의 권력유지 장치가 동시에 작동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자기통제 시스템이라는 보다 진화된 통제방식을 구축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서치’는 디지털 매체를 통해 현실을 인식하는 우리가 궁극적으로 보는 자이자 동시에 보여 지는 자라는 사실을 각성케 한다. 자신의 시선은 곧 타자의 시선이 된다. 이런 방식으로 혼재된 시선은 대중을 주체로서 대상으로서 동시간적으로 분열시킨다. 본다는 의미는 전통적인 권력 작동방식에서 정보의 장악을 의미한다. 정부와 같은 전통적인 조직보다 기계적 알고리즘이 우리의 상황을 보다 정확히 파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독감 바이러스의 창궐을 정부 보건당국보다 구글링을 통해 더욱 신속히 파악할 수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대중이 생산한 빅 데이터에 대한 분석을 선점한 자본은 이미 타미플루를 대량으로 확보하고 창고에 재여 놓을 수 있다. 이제 데이터 생산자로서 대중은 데이터와 특정 제품을 구매해야만 하는 소비의 대상이 된다. 기업은 가격이 오를 대로 오른 다음에 시장에 항체를 풀어 놓을 것이 자명해 보인다. 이미 수많은 희생자가 발생한 후라는 점에서 이 같은 재난은 가공돼 그 이상의 아수라장이 되고, 이를 이용하는 경제 권력은 더욱 거대해지고 공고해질 것이다. 20세기의 대중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것이다.

물론 ‘서치’에서는 반대의 경우이다. 한 개인이 조직에 몸담고 있는 자의 조작에 맞서 구글링을 통해 사건을 해결하고 마침내 소중한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구해 낸다. 바로 이 점에서 영화의 스토리는 환영에 가깝다. 오히려 내용보다 영화의 형식에 리얼리티가 숨어있다. 한 개인의 집념과 노력으로 조작적 현실을 바로잡기엔 ‘네트워크의 바다는 광활’하다. 영화적 개연성을 위해 주인공(존 조 분)을 한국계 미국인 IT업계 종사자로 설정하고 있지만, 엄연히 영화적 장치로서 장르적 리얼리즘에 머물러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자본이 개입된 대중을 대상으로 하는 상업영화의 내러티브는 개인의 역량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존 조가 분한 아버지와 같은 일을 수행하는 것이 가능한 이는 경쟁에서 우위를 점유한 이라는 사실을 널리 유포하고 있다. 4차 산업에서 정보를 바라보고 다루는 권력은 특정한 개인과 같은 소수다. 특히 메이저인 그들에 국한돼 있다는 사실을 공고히 한다.

할리우드의 그들은 영리하게도 독립영화사를 내세워 영화를 제작하고 한국계 미국인을 캐스팅했다. 할리우드가 직접 나서거나 백인남성을 주인공으로 우는 범하지 않고 있다. 강조해서 말하면 영화의 형식이 리얼리티를 구현하고 있지만, 그 내용은 판타지에 머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형식은 21세기 시대정신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으면서도 그 내용은 20세기 형식논리에 머물고 있다는 점에서 모순적이다.

‘서치’를 보고 있자면 한 편의 잘 만들어진 구글, 페이스북, 아이폰, 맥북의 홍보영상을 보고 있는 듯하다. 자료를 찾아보니 감독이 만든 단편영화를 본 구글 측이 무명의 이 감독에게 영화제작 지원을 해주었다는 내용이 검색됐다. 일종의 PPL(간접광고)처럼 구글링을 소재로 한 단편영화를 제작할 것을 주문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장편영화를 제작해 영화감독으로 데뷔했고, 선댄스 영화제와 같은 실험적인 형식을 추구하는 영화제에서 관객의 호응을 이끌어냈다. 이 또한 역설적이지 않은가! 홍보란 이렇게 하는 것인가 보다! 구글의, 구글에 위한, 구글을 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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