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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출산주도성장과 책임감

[칼럼] 출산주도성장과 책임감

기사승인 2018. 09. 16. 0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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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2006년 작 안진우 감독 연출 코미디영화 ‘잘살아보세’는 흥행에 실패하였지만,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큰 작품이다. 영화의 플롯을 따라가며 웃는 사이에 어느덧 이야기는 극단적인 비극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코미디답게 반전의 요소가 가미되고, 급하다 싶게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개인적으로는 이 점이 매우 아쉬운데, 코미디 장르의 관습을 전복하고 영화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처럼 호러로 치닫는 것도 훨씬 더 리얼리티가 살아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코미디 장르의 관습에 충실하게도 내재된 모든 갈등을 봉합하며 그 끝을 마무리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엔 국가와 개인의 문제라는 화두에 대해 사유할 거리를 남겨둔다는 점에서 분명 주목할 만한 구석이 있다.

영화의 기본적인 내용은 70년대 정부의 ‘산아제한정책’에 따라 1년간 출산율 제로를 지키기 위한 마을 사람들의 고군분투를 그리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자청해 ‘출산율 제로 마을’이라는 약속을 지키면 정부로부터 부채를 탕감받을 것을 약속받는다. 그러나 캠페인을 통한 정부요원(김정은 분)과 젊은 이장(이범수 분)의 노력에도 미숙한 콘돔의 사용, 적절치 못한 피임약의 복용으로 임신한 아낙들이 생겨난다. 고육책으로 그들을 이사 보내서라도 출산율 제로를 지키려는 마을 사람들과 이장의 마음은 편치 않다. 그러던 와중에 이장은 자신의 아내의 임신 소식을 듣게 된다. 이장은 이미 자청해 정관수술을 받은 상태라 아내의 임신을 부정한 관계에 의한 것으로 의심한다. 사달이 난 부부는 서로 반목하게 되고 서로 먼저 분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낭떠러지에 투신하려 한다.

이쯤 되면 드라마 ‘사랑과 전쟁’의 소재로도 적당해 보인다. 그렇지만 영화 ‘잘살아보세’는 소재주의적인 코미디에 머무르진 않는다. 영화의 결말부에 이판사판 비극으로 치닫던 마을사람들은 마을의 ‘현명한 지주’에 의해 이장 아내의 목숨을 구하며 마침내 오해와 반목을 풀고 그간 있었던 일들을 덮고 일상을 되찾게 된다. 어쩌면 근대화된 중앙정부의 산아제한정책이 향토에 뿌리박힌 봉건 지주체제를 극복하지 못한 것으로 결말을 해석할 수도 있겠다. 이미 확고하게 자리 잡은 사람들의 의식을 뜯어고치기엔 정부의 정책과 주도면밀한 캠페인도 그 역량을 발휘하기엔 역부족일지도 모른다.

그와 같은 정책과 캠페인이 유신과 같은 독재체제의 것이라 해도 정책이 민초들의 삶을 바꿀 정도로 씨알이 먹히기 위해선 적어도 10년 혹은 20여년의 세월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어떻게 보면 유신시대에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였던 산아제한정책은 이제야 뿌리를 내린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설정처럼 아직 출산율 제로는 달성하지 못했지만, 출산율에 대한 최근의 통계수치를 살펴보면 거의 비슷하게 수렴된 것처럼 보인다. 장기적인 정부의 프로젝트가 지금에서야 씨알이 먹힌 것일까! 과히 역설적인 상황이지 않은가!

반면 한국 동란 이후 70년대까지 20년간은 자연발생적인 출산 주도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내전으로 결혼적령기의 수많은 젊은 남성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게 되고 정부의 정책이나 캠페인이 아니더라도 전쟁복구와 무너진 성비의 회복을 위해 우리네 부모세대는 어느 세대보다도 많이 아이들을 출산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책임감’에서 아이들을 출산한 것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수년간의 전쟁으로 인해 물자가 모자라고 제도가 미비한 상황에서 생후 몇 개월 만에 죽는 아기들이 셀 수 없었던 시대에 생존이라는 문제에 직면한 우리네 부모세대는 보다 많은 다산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것은 책임감과는 다른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불균형을 극복해가는 생명의 자정 과정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따지고 보면 7~80년대 산아제한정책 캠페인을 벌이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자연적인 방식으로 선택하지 않았을까? 소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처럼 70년대 콩나물 교실을 떠오르면 그곳은 분명 정글이었다. 80년대 산업화된 나라에서 우리네 세대는 대학입학이라는 관문을 통과하기 위한 경쟁을 통해 이미 레이거노믹스의 신자유주의를 온몸으로 실천했다. 그 경쟁이 버거워 90년대의 세기말을 관통한 젊은 세대는 서태지의 ‘교실이데아’를 따라 불렀고, 박진영의 ‘엘리베이터’처럼 짜릿한 사랑을 노래하며 압구정동의 오렌지족이 돼 청춘을 연장하고 늦은 만혼을 선택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도 아이도 하나 아니면 둘만 낳았다. 그게 경쟁에서 우위를 점유하기 좋은 포지션이었다. 거추장스러운 가부장적인 전통적 대가족도 폐기해버리고, 부부가 맞벌이로 경쟁력을 갖춰 부동산 장만 등 재테크에 충실했다. 역시 책임감과는 무관한 듯싶다.

영화 ‘잘살아보세’의 제작년도는 2006년이다. 당시 우리나라의 출산율 문제와 고령화 사회로의 진입은 이미 많은 통계지표로 경고되고 있었다. 또한 정부의 정책과 캠페인도 진작에 이뤄지고 있던 시점이다.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을 맡은 감독이 보기엔 격세지감도 이런 격세지감이 없었을 것 같다. 감독의 프로필을 살펴보면 60년대 후반에 태어났다. 그가 보낸 70~80년대의 산아제한정책과 불과 한세대도 꽉 채우지 못한 20~30년 후인 2000년대의 출산장려캠페인은 난센스처럼 보였을 것 같다.

감독과 비슷한 연배인 필자의 유년시절엔 ‘혼분식장려운동’ 있었는데, 부족한 쌀의 생산량을 메꾸기 위해 당시 정부는 밀가루의 우수성을 강조하고 밀의 소비를 촉진시켰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밀가루 음식의 폐해에 각종 매체를 통해 알리는 정보를 쉬이 접하게 된다. 물론 각기 다른 상황이며 그 맥락이 달랐을 것이기에 이해가 된다. 그렇다고 해도 한 세대를 넘지 않는 오락가락하는 정책적 혼선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긴 충분한 듯싶다. 그렇다면 정부의 정책과 캠페인은 어디까지 우리가 취사선택해야 하는가? 정답을 찾기보다 정권을 뽑을 때 정책을 꼼꼼히 살펴야 할 것이다.

일전에 구정권인 어느 야당의 당 대표가 출산 주도성장을 외치고 나섰다. 이어서 그 당의 국회의원의 보탠 말이 매체와 SNS에 오르내리며 논란이 되었다. “요즘 젊은이들은 내가 행복하고 내가 잘사는 것이 중요해서 애 낳는 것을 꺼린다. 최근에는 아이 셋 손 잡고 다니는 것을 오히려 창피해한다더라. 우리 부모세대들은 아이를 키우는 게 쉬워서 아이를 많이 낳았겠는가? 출산이 중요한 일이라는 가치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년들이 가치관부터 바꿔야 한다.” 매체를 통해 전해진 그의 말을 그대로 옮겼다. 그런데 가치관을 들먹이며 훈계를 하는 그의 말에 모순이 넘쳐나는 듯싶다.

출산율 문제를 가치관의 문제로 언급하기에는 해당 국회의원이 말한 부모세대는 너무도 많은 악조건을 만들어 놨다. ‘총,균,쇠’의 저자 재러드 다이아몬드는 어떤 불리한 조건에 처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살기의 중요성을 강요하기엔 그들의 조건은 너무도 열악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였음을 역사와 사회, 과학적 지식을 망라하며 역설하고 있다. 다시 말해 가치관이나 의지의 문제를 들먹이며 열패감에 젖은 이들에게 기득권의 잣대를 대서는 안 되는 이유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젊은 친구들이 자립할 기회를 뺏고, 나의 행복과 내가 잘사는 것에만 몰두한 세대는 누구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가치관을 들먹이며 1억의 돈다발을 흔드는 그들의 행태를 접하면서 작금의 젊은이들이 어른들의 말을 듣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분명하고도 명확하게 보이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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