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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전망 좋은 방

[칼럼] 전망 좋은 방

기사승인 2018. 11. 16. 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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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M. 포스터의 동명소설을 각색한 영화 ‘전망 좋은 방’은 빅토리아 시대의 끝, 제국주의 정점에서 영국 상류 사회계급계층의 허위의식에 대해 코믹한 방식으로 풀어낸 멜로드라마다. 등장인물들을 통해 영국의 런던과 이탈리아 피렌체를 오가며 계급계층을 뛰어넘는 사랑을 그림으로써 포스터가 살았던 동시대의 체제에 대한 비판과 해체를 시도하고 있다.

영화는 당대 인물들의 허위의식을 뛰어난 연기로 소화해낸 연기자들의 탁월한 연기력으로 인해 시대극임에도 불구하고 몰입하면서 볼 수 있는 대중적 흡입력을 갖추고 있다. 잘 알려진 문학작품을 영화화하는 작업은 비교 대상이 분명하기 때문에 비평가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위험이 따른다. 그러나 이 작품은 피렌체의 풍광과 더불어 장면마다 아름다운 장소 헌팅에 몰입해온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 특유의 스타일로 인해 스크린을 꽉 채우는 풍부한 화면을 선사한다. 제목 그대로 볼거리가 많은 ‘전망’ 좋은 영화다.

필자가 강의하는 영상 스토리텔링 수업에서 학생들이 스케치해온 어떤 ‘전망 좋은 방’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단편영화의 형식을 취한 학생 작품에 등장하는 풍경은 고시학원으로 유명한 노량진의 거리다. 인파를 뚫고 젊은 남녀가 고시원 건물로 들어간다. 곧이어 장면이 바뀌고 둘은 작은 고시원 방에서 짐을 정리한다.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남녀의 관계는 오누이임이 드러난다. 여동생이 이삿짐을 쌓는 일을 도우러 친오빠가 온 것이다. 짐 정리 중 먼지가 날리고 오빠는 창문을 연다. 창밖으로 바짝 붙어있는 옆 건물의 회색빛 벽돌이 민낯이 보인다. 햇볕도 들지 않는 어찌 보면 환기조차 될 것 같지 않다. 전망이라곤 아예 없다.

이어진 장면은 다시 고시촌 거리 풍경, 그들의 대화와 표정을 보아 성공적으로 고시촌을 떠나는 것처럼 보이진 않는다. 트렁크를 밀며 끄는 오누이는 택시를 탈 것처럼 보이나 그냥 지나친다. 어쩐 일인지 그들은 멀지 않은 곳의 어떤 건물로 다시 들어간다. 또 다른 고시원이다. 장면이 바뀌고 그들은 짐을 푼다. 오빠가 나서 짐을 푸는 사이 여동생은 창문을 연다. 환한 빛과 소음이 실내로 들어온다. 창문으로 몸을 뺀 여동생의 시야에 자동차가 분주히 다니는 거리가 보인다. “오빠 이리 와봐, 전망이 너무 좋아!” 모습은 보이지 않고 화면 밖에서 오빠의 화답이 들린다. “미안해 좀 시끄럽지! 오빠 알바 월급 오르면 좀 더 좋은 방으로 옮겨 줄게”

마지막 장면, 창문 밖을 내다보는 오누이의 모습이 클로즈업돼 보이다가 카메라가 줌 아웃되면서 고시원 전경과 그 앞으로 차들의 빽빽한 행렬이 보이는 화면 위로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다. 자그맣게 보이는 창가의 오누이는 창문을 닫을 생각이 없는지 긴 호흡의 크레디트가 끝날 때까지 노량진의 뿌연 공기를 너무도 달게 호흡한다. 그 모습이 너무나도 해맑아 슬퍼 보였다.

며칠 전 종로의 고시원에서 불이 났다. 7명의 생명을 앗아간 화마는 멈추었지만, 아직 그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시민들이 남겨놓은 꽃과 음료수들은 점점 쌓여가고 있다. 뉴스 보도를 통해 희생자들의 짐을 정리하는 모습이 전파를 탔다. 저마다 가방 하나 정도가 전부라고 한다. 그 좁은 공간에 많은 짐은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탈출에 성공한 마지막 생존자의 증언은 더욱 우리의 가슴을 저며 온다. “내가 마지막이었어요. 내 뒤에 따라 나온 사람들은 다 못 나왔어요” 그런데 그 마지막 생존자는 또다시 고시원을 찾아 거리를 헤매고 있었다. “어딜 가겠어요. 다른 고시원을 찾아봐야죠”

‘전망 좋은 방’에서 제국주의 시대 상류사회의 허위의식은 계급 계층이 다른 남녀의 사랑으로 그 허울이 벗겨지고 희화화된다. 하지만 실제로 당시엔 그런 일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 같다. 차이가 있다면 현재 우리의 문학에선 낭만은 키워드가 아니라는 점이다. 허무적 표현과 분노가 가득 차 있다. 젊은이들이 그려낸 ‘전망 좋은 방’은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젊은 시절의 가난과 고생을 낭만적으로 보이기보다 굴레가 돼 지속될 것 같은 불안과 허무로 읽힌다. 구조화된 양극화는 영화처럼 하층계급이 상류사회와 교류될 기회도 공간적으로 허락되지 않아 보인다. 다시 말해 노는 곳이 틀려 부딪힐 일도 없다. 중의적 표현으로 전망이 다른 공간을 살고 있는 것이다.

이제 시쳇말로 전망이 좀 빠지는 곳의 젊은이들의 허무와 분노는 어디를 향하고 있는가? 스스로 타자임을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다른 타자를 찾아내 그들에게 분노를 쏟아내고 있는 상황마저 속출하고 있지는 않은가! 분노와 허무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대안을 찾아보자고 ‘멘토’를 자처하기에도 머뭇거리게 된다. 그저 기성세대의 한사람으로서 미안하고 부끄럽다. 잠시 호흡을 다잡고 희생된 고인들의 영면을 기원한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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