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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인천 교동도...그리움이 켜켜이 쌓인 그 섬

[여행] 인천 교동도...그리움이 켜켜이 쌓인 그 섬

기사승인 2018. 11. 20.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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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교동이발관 지광식
교동도 대룡시장에서 교동이발관을 운영하고 있는 지광식 할아버지. 한국전쟁 직후 12살의 나이에 북녘의 고향을 떠난 그는 60여년 동안 고향을 그리며 살아왔다.
여행 화개산
교동도 화개산 정상에서 본 풍광. 멀리 물길 뒤로 보이는 곳이 북한 황해남도 연안군, 배천군에 걸쳐 있는 연백평야다. 교동도에서 2~3km에 불과한 거리지만 닫힌 북녘의 문은 60여년간 열리지 않고 있다.
여행/ 화개산
화개산 정상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풍경. 맑은 날에는 다도해 못지 않은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다.
“황해도 연백군 호동면 남당리 장수동 세미마을!” 지광식(80) 할아버지가 나고 자란 곳이다. 그는 자녀들에게 이 주소를 절대 잊지 말라고 신신당부한다.

인천 강화도 서북쪽에 교동도라는 작은 섬이 있다. 지 할아버지는 이 섬의 대룡시장에서 ‘교동이발관’을 운영한다. 그는 1952년 한국전쟁 당시 13살의 나이에 북녘의 고향을 떠나 이곳에 들어왔다. 18살때부터 이발 기술을 배워 지금까지 이발관을 이어오고 있다. 황해도 연백군은 현재 황해남도 연안군·배천군으로 행정지명이 바뀌었다.

“아버지가 북한 어디서 피난을 나왔는지 알아야죠. 이렇게라도 알려줘야 통일 되면 찾아가지 않겠어요? 우리 세대에는 못 가본다고 해도 애들은 갈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옛날에는 쌍안경 들고 아이들과 고향 땅 보러 (교동면) 지석리에 많이 다녔어요. 3km 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니까 보이죠. 그래서 동네 주소를 알려줬지요.”

지 할아버지가 교동도에 터를 잡은 데는 이유가 있다. 교동도는 북한 황해남도 연안군·배천군과 직선거리가 2~3km에 불과하다. 북한 연백평야와 교동도 사이를 지나는 서해의 폭도 좁다. 2014년 여름 북한 주민 2명이 바다를 헤엄쳐 건너 교동도로 귀순했을 정도다. 지 할아버지는 전쟁이 끝나고 난리가 수습되면 얼른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했다. 그런데 한번 닫힌 북녘의 문은 60여년이 흐른 지금까지 열리지 않고 있다.

대룡시장 교동이발관
교동도 대룡시장의 교동이발관. 500m도 채 안되는 골목에는 1970~80년대 시장풍경이 오롯하다.
여행/ 교동도 대룡시장
대룡시장은 한국전쟁 직후 북녘의 고향을 떠나 이곳에 정착한 사람들이 생계를 위해 고향의 시장을 본떠 만들었다.
여행
교동도 대룡시장의 동산약방.
교동도 교동다방
쌍화차가 맛있는 ‘교동다방’.
지 할아버지와 같은 피난민들이 그와 같은 생각으로 교동도에 모였다. 그리고는 생계를 위해 고향의 ‘연백시장’을 본떠 골목시장을 세웠다. 이게 대룡시장이다. 대룡시장은 한국전쟁 이후 한동안 교동도의 경제 중심지가 됐다.

500m도 채 안 되는 골목은 60년 전과 비교해 넓어지지도, 길어지지도 않았다. 산에서 해 온 나무로 말뚝 박아 만든 집터 자리에 딱 그 크기만한 슬레이트 건물이 들어섰다. 골목에는 1960~70년대 시장풍경이 오롯하다. 촌스러운 이름의 간판, 알록달록한 의류며 하얀 고무신이 늦가을 한기를 녹여줄 따뜻한 정서를 끄집어낸다. 낡은 풍경 속에 연애편지만큼 애틋한 그리움이 흘러 다닌다.

이 때문에 대룡시장은 십여년전부터 ‘빈티지’ 사진촬영지로 입소문을 탔다. 알음알음 찾는 이들이 생겨났다. 2014년 강화도와 교동도가 다리(교동대교)로 연결된 후부터는 관광객들이 부쩍 늘었다. 교동이발관을 비롯해 오래 전 모습 그대로인 ‘동산약방’, 계란 띄운 쌍화차가 유명한 ‘교동다방’ 등은 명소가 됐다. 지 할아버지도 이미 ‘아이돌’ 못지않은 스타가 됐다. 교동도와 대룡시장은 최근 남북 평화분위기와 맞물리며 다시 관심대상이 되고 있다.

변화도 있다. “대북방송이 없어졌어요. 전에는 아침마다 라디오 켜 놓은 것처럼 웅웅거렸는데. 이 앞(한강 하구)으로 남한과 북한의 배들이 왔다갔다 할 거라죠?”

이제는 철조망만 걷히면 된다. “다 좋은데 일단 이 섬에 쳐진 철조망부터 없애야 해요. 저기 철조망 앞 바다가 옛날에는 숭어 구덩이였어요. 그물을 던지면 숭어들이 금새 가득 찼어요. 그물이 어찌나 무거운지 바다에서 끝고 나오질 못해서 그물 중간을 잘라버렸다니까요. 지금은 남산포 빼고는 해안가에 철조망을 다 쳐놓아서 낚시도 못해요.”

교동도
교동도 연산군 유배지. 교동도는 예부터 왕족의 유배지였다.고려의 희종을 시작으로 조선의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연산군 등이 이곳에 유배와 생을 마감했다.
여행/ 화개사
교동도 화개사.
대룡시장 뒤로 화개산(259.6m)이 우뚝 솟았다. 높지 않아도 섬에 솟은 산이라 시야가 탁 트인다. 정상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고구저수지 뒤로 북한의 연백평야(황해남도)가 훤히 보인다. 그 어디쯤이 지 할아버지의 고향이다. 서남쪽으로는 한려해상, 다도해 못지않은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다. 석모도를 비롯해 기장섬·주문도·미법도·아차도·서검도·불음도·납섬·함박도·말도 등 크고 작은 섬들이 자리를 잡았다. 화개사나 연산군 유배지 등에서 정상까지 등산로가 잘 갖춰져 있다. 어느 곳에서 출발하든 1시간 안에 정상에 닿을 수 있다.

‘전쟁 1세대’ 피난민들은 지척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이제는 지 할아버지가 대룡시장 유일의 전쟁 1세대다. 젊은이들에게 전쟁은 먼 이야기가 됐다. 그는 고향이 더욱 멀어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

“나이가 80살이나 되니까 다 떠나더라고요. 그 사람들이 있어야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여기서 태어난 얘들은 6·25를 몰라, 겪어보지 못했으니까요. 우리 대통령이 북한에 왔다갔다 해도 부모들보다 관심이 없어요. 예전에도 두 번이나 대통령이 북한에 갔었잖아. 그 때랑 분위기가 달라졌다고 하는데, 얘기를 할 사람이 없으니 나 혼자 계산도 해봤다가 기대도 해봤다가, 그러는 거지.”

교동도는 ‘왕족의 유배지’였다. 고려 희종을 필두로 조선의 안평대군·임해군·능창대군·중종반정으로 쫓겨난 연산군까지 모두 이곳으로 유배와 생을 마감했다.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지 할아버지의 처지는 또 다른 ‘유배’다.

“우리 세대에 통일을 보기는 어려울 겁니다. 왕래만이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지. 죽기 전에 내가 살던 땅이라도 한번 밟아보고 싶은데… 오래 살면 그런 덕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고. 지금껏 고향 가려고 기다렸는데…”

여행/ 남산포
사위가 고요한 교동도 남산포. 풍경이 참 평온하다.
여행/ 교동읍성
교동읍성.
여행/ 옛 교동교회
1933년 세워진 교동교회. 한옥 형태의 건물이 단아하다. 강화도에서는 4번째, 교동도에서는 첫번째로 지어진 교회다.
교동도에서는 분단의 아픔, 필사의 여정을 곱씹을 수 있다. 그래서 풍경의 무게감이 여느 경승지보다 두 배는 더 묵직하게 다가온다.

늦가을 교동도는 사위가 고요하고 풍경은 애틋하다. 이를 곱씹으며 드라이브를 하면 마음이 참 차분해진다. 차로 섬을 한바퀴 도는데 1시간도 채 안 걸린다. 대룡시장 입구에 ‘교동 제비집’이 있다. 섬을 돌아볼 수 있는 자전거를 대여해 주고 교동도 여행 관련 정보도 얻을 수 있다.

둘러봐야 할 몇 곳을 소개하면 이렇다. 남산포구는 조선시대 경기수영이 생긴 후 수군의 훈련장으로 쓰이던 곳이다. 고려시대에는 중국을 오가던 사신들이 이 포구를 통해 교동도에 들어왔다. 철책이 없는 서해의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교동읍성은 조선시대 경기수영을 설치하며 돌로 쌓은 성이다. 삼도수군 통어영의 본진으로 사용됐다. 옛 교동교회는 1933년 기독교가 교동도에 전파될 당시 세워졌다. 강화도에서는 4번째로 지어진 교회다. 한옥 형태의 건물이 참 단아하다. 지금도 옛 모습이 잘 남아있다. 고구저수지에서는 물새들이 활기찬 몸짓을 감상할 수 있다.

가는 가을만큼 애틋한 그리움이 밀려들 때 교동도에 가본다. 그리움에 한바탕 몸서리치고 나면 가을을 잘 보낼 수 있다. 자동차로 교동대교를 건너 교동도로 들어갈 때 군 검문소에서 출입증을 준다. 섬에서 나올 때 반납하면 된다. 강화도에서 교동도까지 버스가 하루 10여차례 운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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