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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의 복싱비화] ‘검은9월단’ 때문에 날아간 메달의 꿈

[조영섭의 복싱비화] ‘검은9월단’ 때문에 날아간 메달의 꿈

기사승인 2018. 11. 2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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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복싱 트로이카 유종만
뮌헨 올림픽서 테러사건 다음날 브리진스키와 8강전
잠 설치고 도시락 점심 해결...어수선한 분위기에 분패
74년 테혜란 아시안게임 동반 금메달 유종만(좌측)과 김태호
유종만 한국체대 교수(왼쪽)와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김태호 /제공=조영섭 관장
필자는 최근 유종만 한국체대 교수(64)를 만났다. 김태호 선배(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와 함께 방문한 자리에서 옛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눴다. 유종만 교수와의 인연은 1983년 10월 시작됐다. 필자가 몸담고 있던 88프로모션으로 유 교수가 찾아왔다. 당시 만 29세 대학 조교의 신분이었던 그는 프로모션에 입단 예정인 당시 고교랭킹 1위 박용운(부산 금성고)을 한국체대로 스카웃하기 위해 찾아왔었다.

1972년 독일 뮌헨올림픽에서 첫 태극마크를 단 유종만은 1973년 제3회 대통령배 대회 밴텀급 우승과 함께 베스트복서에 선정된다. 복서 유종만은 선천적으로 동체시력이 뛰어났고, 발레리나처럼 리드미컬한 풋워크에 이은 발칸포처럼 뿜어대던 왼손카운터 펀치가 발군이었다. 그의 발칸포 펀치에 1973년부터 1975년까지 최고 선수들이었던 천흥배, 김성은, 최충일, 백종우 등이 무릎 꿇었다.

원광대에 입학한 1974년부터 페더급으로 활동한 유종만은 이번엔 국제무대를 평정하면서 그 해 테헤란 아시안게임, 1975년 킹스컵 1977년 아시아선수권을 모조리 우승하며 박찬희, 김태호와 함께 트로이카를 형성한다.
72년 뮌헨 올림픽출전한 고교생 유종만-crop
1972년 독일 뮌헨올림픽에 출전한 남성고 2학년 유종만. /제공=조영섭 관장
하지만 유종만의 반세기에 달하는 복싱 여정에서 잊지 못할 기억은 고교 2학년 때 처녀 출전한 뮌헨올림픽이다. 본선에서 2연승을 거두고 8강에 진출한 유종만은 1972년 9월 5일 유럽선수권자인 브리진스키(폴란드)와 경기를 앞두고 새벽에 울린 한발의 총소리에 잠을 깼다. 한국팀 숙소 맞은 편에 있던 이스라엘팀 숙소에 총기로 무장한 ‘검은9월단’ 소속 팔레스타인 무장게릴라가 올림픽선수촌의 이스라엘 숙소를 공격해 이스라엘 선수 2명이 피살되고 9명이 인질로 잡히는 초유의 테러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유종만을 비롯한 한국선수단은 새벽 단잠을 빼앗긴데다 이스라엘 선수들이 한국선수촌으로 뛰어드는 등 어수선한 상황이 벌어지자 숙소에 갇혔다. 경황 없는 상황에 식사도 제때 하지 못하는 악조건에서 올림픽 경기에 출전하게 됐다.

점심도 도시락으로 해결한 그날 경기에서 유종만은 유럽선수권자인 브리진스키와 일진일퇴의 치열한 공방 끝에 2-3으로 분패했다. 이 경기를 관전하던 당시 주상점 대한아마복싱연맹 부회장은 판정에 반발하며 호주심판에게 달려가 격렬히 항의했지만 뒤집을 순 없었다.

결국 한국은 뮌헨올림픽에서 6체급에 출전했지만 노메달로 허탈하게 귀국한다. 1960년 로마올림픽 이후 2번째 노메달이었다. 국비로 뮌헨올림픽에 관광을 보냈다는 비아냥 섞인 질타도 들었다.
74년 테혜란 아시안게임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복싱 페더급 금메달을 획득한 유종만(뒷줄 가운데)과 김택수 전 대한체육회장(앞줄)이 시상식을 갖고 있다. /제공=조영섭 관장
이후 유종만은 1974년 12월 아시아올스타로 뽑혀 미국 네바다주에서 북미선수들과 대륙간컵 대회를 치른다. 그는 북미 대표들과 벌인 3연전에서 국내복서로는 유일하게 전승을 거둔다. 특히 2차전에서 벌어진 마이크 헤스(미국)와의 대결에서 2회 RSC승 한 경기는 아마복싱의 진수를 느끼게 할만큼 강렬한 인상을 줬다. 이 경기로 탈(脫)아시아권 복서로 국제적으로도 실력을 인정받은 유종만은 1974년 대한 아마복싱 최우수복서로 선정됐고 (당시 최우수신인은 박찬희) 1975년 대한민국 체육상 경기부문에서 표창을 받는다.

연전연승을 이어오던 유종만도 1975년 일본에서 열린 아시아선수권에서 금메달을 차지했지만 왼손에 부상을 입으면서 시련이 찾아온다. 국내외에서 잦은 경기일정으로 인해 부상과 함께 휴식이 필요한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전북체육회에서는 그 해 9월에 벌어지는 전국체전 출전을 요구하면서 부상은 더 커졌고,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출전이 무산됐다. 당시 언론에서 올림픽에서 숙원인 금메달을 실현시킬 최고 유망주라고 특필했던 그였기에 부상의 여파는 더욱 컸다. 만약 유종만이 정상적으로 출전했다면 북한의 구영조를 꺾고 한국 복싱사상 최초의 금메달을 따냈을지도 모른다.
73년 최충일과 첫대결에서 승리하는 유종만(우측)
1973년 유종만(오른쪽)과 최충일의 1차전 경기. 이날 경기에서 유종만이 판정승을 거뒀다. /제공=조영섭 관장
모두가 유종만의 시대는 끝났다고 말했을 때 그는 초심으로 돌아가 재기를 꿈꿨다. 원광대 졸업반인 1977년 7월 복병 임병진(대우개발)을 꺾고 1년이 넘는 공백을 넘어 대표팀 컴백에 성공했다. 1977년 자카르타에서 열린 제8회 아시아선수권에서 유종만은 다시 한번 보란 듯이 페더급 정상에 우뚝 서며 유종의 미를 장식했다.

위기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새롭게 시작했던 그의 오뚝이 정신은 우리에게 좋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 서울시복싱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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