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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보헤미안 랩소디와 표준의 역설

[칼럼] 보헤미안 랩소디와 표준의 역설

기사승인 2018. 11. 27.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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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방송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알쓸신잡’의 한 섹션을 포털에서 우연히 접했다. 출연진들이 얘기꽃을 피운 유럽의 도량형 통일에 대한 역사가 흥미로웠다. 프랑스혁명 이후 정부가 가장 먼저 수행한 일이 도량형 표준을 정하는 일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단두대에서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 루이 16세가 혁명 정부의 압력에 왕으로서 마지막 사인한 일 역시 도량형 통일 공표였다. 현재 사용하는 미터법이 전 세계로 퍼질 수 있었던 계기 또한 나폴레옹의 정복 전쟁의 결과다. 그러나 예외로 트라팔가르해전의 승리로 나폴레옹의 지배를 피할 수 있었던 영국은 파운드를 사용하게 됐다고 한다. 또한 영국계 후예들의 메이저인 미국 역시 지금까지 파운드와 야드를 표준으로 사용하고 있다.

오늘 새벽(한국시간 27일 오전 5시경) 미국 항공우주국(NASA)은 화성탐사선을 화성에 착륙시켰다고 발표했다. 의미 있는 성공이다. 그런데 사실 이보다 앞서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화성 탐사수행을 떠났던 인공위성이 10개월간의 여정을 끝내고 1999년 9월 화성궤도 진입을 시도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실패했다. 당시 나사의 과학자들은 즉각 원인 규명에 나섰다. 밝혀진 실패 원인은 어처구니없게도 위성추진체의 추진력 계산식에 실수로 미터법이 아닌 야드와 파운드로 된 데이터를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잘못된 궤도에 진입한 위성은 낮은 궤도의 화성 대기저항을 극복하지 못하고 추락하고 만 것이다. 세계의 중심국가임을 자처하는 미국이지만 세계표준인 미터법을 사용하지 않아 수년간의 프로젝트가 한순간 수포로 돌아가는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 그만큼 과학과 시스템에서는 표준이 중요한 것이다.

좀 다른 얘기지만, 며칠 전 연일 박스오피스 1위를 달리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퀸 음악과 동명)’를 봤다. 평소 음악영화를 좋아하는 필자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영화를 보는 동안 음악을 즐겼고 눈물을 흘렸다. 마이너리티에서 성장하는 뮤지션들의 성공기와 성공 후의 갈등은 매우 장르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에 내재된 ‘꿈의 이데올로기’에 대해 비판하고자 함이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점이 음악영화를 좋아하는 장르적 코드이기에 필자에겐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단, 필자가 주목한 것은 1975년 ‘보헤미안 랩소디’를 작곡하는 과정에서 그룹 퀸의 멤버들과 주인공 프레디 머큐리가 제작기획자의 투자자와의 벌인 설전이다.

투자자는 그룹 퀸에게 ‘보헤미안 랩소디’는 방송표준으로 적합한 분량인 3분을 훨씬 뛰어넘는 6분의 대곡이라 곤란하며 공연하기엔 지나치게 현란하고 시대에 맞지 않는다고 개작을 요구한다. 하지만 퀸의 멤버들은 단호히 거절하고 결별을 선언한다. 기획사가 뚫어놓은 탄탄대로를 마다한 것이다. 결국, 퀸은 모든 매체로부터 방송을 거절당하고 만다. 우호적인 비평기사 또한 찾기 어려웠다. 우여곡절 끝에 평소 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은 매체가 그들의 음악을 전파하게 된다. 이로써 곡이 발표된 지 일 년 후에야 세계의 젊은이들은 봇물이 터지듯 퀸을 연호하고, 그들의 음악을 신앙으로 받아들인다. 표준을 따르지 않은 대가는 잠시 혹독하였지만 짧게 끝났다. 반면 영광은 길이길이 팝 음악사에 남게 됐다. 과학이나 시스템과는 별개로 팍팍한 사람살이와 예술에선 표준은 벗어나야 할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그룹 퀸의 보컬인 프레디 머큐리는 그 존재 자체가 당대 영국사회의 표준에 벗어난 마이너리티의 상징이었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탄자니아의 잔지바르가 출신지이며 앵글로색슨과는 거리가 먼 인도계였기 때문이다. 힌두교가 주류를 이루는 인도에서도 그들의 조상은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마이너리티였다. 그 어디에서도 머큐리의 가족들은 주류사회에 들어갈 수 없는 부유하는 삶이었다. 머큐리가 유명해지자 그의 성 정체성은 언론에게는 가십거리의, 보수적인 가치를 가졌던 기성세대로부터는 힐난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이방인의 색채가 짙은 ‘파로크 불사라’라는 본명을 프레디 머큐리로 바꾼 것을 보면 머큐리가 주류로 진입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거부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분명한 것은 소수자로서 타인의 따가운 시선들로부터 고통을 받기도 했지만, 그는 주체적으로 살고자 했던 뜨거운 ‘욕망의 실천자’였다.

2018년 겨울의 초입, 지금 우리 사회는 성 소수자이자 다문화가정 출신 이민자이자 1970년대 마이너리티를 대변해 노래를 부른 1946년생 프레디 머큐리에게 열광하고 있다. 그러나 영화적 현실과 실제는 괴리가 있는 것 같다. 최근 러시아 출신 엄마와 단둘이 살던 다문화 가정 중학생 아이의 황망한 죽음이 사회문제로 이슈화됐다. 또래 친구들의 구타를 피하다 추락사한 사건이다. 이러한 사실과 프레디 머큐리 현상과의 괴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그 답을 구하기가 궁색해진다. 어쩌면 ‘대중문화 현상으로서 프레디 머큐리’는 우리사회 대중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성공의 아이콘’으로서 사회적 유행과도 같은 하나의 ‘목표점으로서 표준’일지도 모른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표준의 역설이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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