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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 별세, 미 정파 떠나 추모 분위기

‘아버지’ 부시 전 대통령 별세, 미 정파 떠나 추모 분위기

기사승인 2018. 12. 01.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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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냉전 평화 승리로 종식"
오바마 "애국적 겸손 종복을 잃었다"
소련 붕괴 등 냉전 종식기 대통령직 수행
한국 국회 연설 두차례 유일
GHW BUSH OBIT
조지 허버트 워커(H.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재임 1989~1993년)이 30일(현지시간) 별세했다. 향년 94세. 부시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부인 바버라 여사가 92세를 일기로 별세한 뒤 입원을 반복하며 치료를 받아왔다. 사진은 2001년 5월 23일 찍은 부시 전 대통령 부부./사진=UPI=연합뉴스
조지 허버트 워커(H.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재임 1989~1993년)이 30일(현지시간) 별세했다.

향년 94세. 부시 전 대통령은 지난 4월 부인 바버라 여사가 92세를 일기로 별세한 뒤 입원을 반복하며 치료를 받아왔다.

자녀는 아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등 5명을 뒀다.

그의 별세에 미국 정가는 정파를 떠나 추모의 메시지를 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부부는 트위터 성명을 통해 “부시 전 대통령은 건강한 판단과 상식, 흔들림 없는 리더십으로 우리나라와 세계를 이끌어 냉전을 평화로운 승리로 종식했다”며 그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부시 전 대통령은 이 모든 것을 성취하면서도 겸손했고 공공의 부름에 조용히 응했다”면서 “그는 가족에 헌신함으로도 기억될 것이다. 특히 생애의 사랑 바버라와 함께 미국인에게 본보기가 되는 삶을 살았다”면서 “모든 미국인의 기도를 전체 부시 가족에게 보낸다. 41대 대통령의 삶과 유산을 기릴 것”이라고 강조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부부도 트위터를 통해 “미국은 조지 허버트 워커 부시라는 애국적이고 겸손한 종복(Servant)을 잃었다. 오늘 우리 마음은 무겁지만 또한 감사로 가득 차 있다”라고 슬픔을 표현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부시의 삶은 공공에 봉사함이 고귀하면서도 즐거움을 부르는 일이며 놀라운 여정임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오바마는 “조지와 바버라는 73년간의 결혼생활을 거쳐 이제 다시 함께 있게 됐다”라면서 “우리 마음은 오늘 밤 전체 부시 가족과 함께한다”라고 썼다.

고인의 행정부에서 국무장관을 지낸 오랜 친구인 제임스 베이커는 “내 친구의 유산은 미국과 세계의 역사에 영원히 새겨질 것”이라며 “평생에 걸친 이타적인 애국적 봉사를 실천한 그는 강인함과 열정, 끈기, 겸손함으로 이를 이끌었다. 그는 세계 무대에서나 일상적인 삶에서나 모두 그만의 독특한 일관성을 보여줬다”고 추모했다.

CNN방송 등 미국 언론은 고인이 소련 붕괴 등 냉전 종식기에 미국 대통령을 지냈고, 73년 동안 해로한 부인 바버라 여사 별세 때의 모습을 집중 부각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탈(脫) 냉전의 분위기가 싹트던 시기에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미·소 정상회담을 통해 40여 년에 걸친 냉전의 종식과 동서 화합을 선언하기도 했다.

부시 전 대통령은 4년 재임 기간, 두 차례 한국 국회 연설을 진행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비록 재선에는 실패했지만 장남 조지 W. 부시를 제43대 대통령으로 키워내는 등 미국적 전통 가치를 존중하는 부시 가문을 케네디가(家) 못지않은 최고의 정치 명문가로 만들었다.

이들 두 명의 부시 대통령은 미국 역사상 두 번째 ‘부자(父子)’ 대통령으로 기록됐다. 부인인 바버라 여사는 남편과 아들을 대통령으로 키워낸 ‘국민 할머니’로 미국인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차남 젭도 플로리다 주지사를 지냈다.

그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라는 가풍에 따라 예일대에 입학하는 것을 포기하고 자원 입대해 해군 항공모함 뇌격기 조종사로 위험한 임무를 수행했다.

1944년에는 임무 수행 도중 일본군의 공격을 받고 바다에 추락해 표류하다 구출되면서 2차 대전의 영웅 반열에 올랐다. 그는 2차 대전에 참전한 미국의 마지막 대통령이기도 하다.

예일대 경제학부 졸업 후 석유 회사를 공동 창업해 경영하다가 1966년 하원의원 선거(텍사스 제7선거구)에 당선돼 정계에 입문했다.

이후 유엔 주재 대사, 국무부 중국 연락사무소장에 이어 중앙정보국(CIA) 국장까지 올랐다.

1980년 공화당 대선후보 경선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레이건 당시 후보의 부통령 러닝메이트로 지명된 그는 레이건 대통령 재임 8년간 부통령으로 함께 하며 차기의 대망을 키웠다.

결국 그는 1988년 대선에 공화당 후보로 출마해 민주당 후보였던 마이클 듀카키스 매사추세츠 주지사를 누르고 당선, 이듬해 제4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라크에 침략당한 쿠웨이트를 해방한다는 명분으로 시작한 ‘걸프 전쟁’에서 약 43만 명의 대군을 파병해 승리를 거둔 것이 부시 전 대통령의 가장 큰 치적으로 꼽힌다.

33개국 약 12만명의 다국적군까지 합세한 대(對) 이라크 총공세는 ‘사막의 폭풍’이라는 작전명으로 전쟁사에 남았다. 한국도 당시 군 의료진과 수송기 등을 파견하며 다국적군에 참여했다.

그는 이라크전 승리 후 전임자인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에 버금가는 인기를 누렸지만 이후 경기 침체와 만성적인 재정 적자 등 국내 경제적 요인으로 민심을 잃어 1992년 대선에 빌 클린턴 전 대통령에게 져 재선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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