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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영화 ‘그린 북’, 경계에 선 자들 - 전복적 오르페우스

[칼럼] 영화 ‘그린 북’, 경계에 선 자들 - 전복적 오르페우스

기사승인 2019. 01. 20.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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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교수
영화 ‘그린 북’은 두 명의 남자 주인공이 이끄는 로드무비 형식의 버디 영화이다. 상반된 캐릭터가 우연한 계기로 만나 여행을 떠나는 형식을 취한다. 스토리의 전개는 대부분 갈등과 상처의 과정을 극복, 마침내 이해의 단계에 들어서게 되며 서로가 일정 부분 닮아있는 것을 발견하거나 혹은 둘의 관계가 전복되기도 한다. ‘그린 북’ 역시 이와 같은 정형화된 포맷을 따르고 있다. 영화의 결론은 극단적이지 않으며 소소한 화해의 정서로 끝을 맺는다. 그럼에도 이 영화를 ‘정형성’과 ‘타협의 코드’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는 ‘경계에 선 부유하는 삶’을 바라보는 시선이 매우 감각적이면서도 세밀하게 묘사돼 있기 때문이다.

천재뮤지션 피아니스트 셜리 박사는 미국 남부로 연주 여행을 계획한다. 영화의 배경보다 조금 앞선 시기인 1955년, 버스에서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된 흑인 여성 로사 파크스 사건 이후 흑인 인권운동이 미국 전역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당시 남부의 분위기는 흑인을 능멸하는 일이 자연스러웠다. 인종차별을 금지하는 행정명령이 내려진 것은 1964년 존 F. 케네디의 정책을 이은 대통령 린든 존슨에 이르러서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1962년 겨울은 이러한 갈등의 정점에 있었다. 예민한 때에 셜리 박사는 남부의 유력자들 앞에서 공연을 자청한다. 그들은 그런 셜리를 환영하는 제스처를 취하지만 숙소·식당·화장실까지 따로 사용할 것을 요구한다. 사소함 속에 숨어있는 조직적인 제도적 모욕을 감내하면서까지 그는 투어를 끝내려고 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연주할 곳은 미국 남부의 인종차별이 심한 앨라바마주 버밍햄에 있는 백인 전용 클럽이다.

셜리 박사의 투어를 돕고자 8주간 고용된 토니는 이탈리아계 이민자 출신의 노동자다. 걸출한 성격과 박력으로 주변의 이탈리아계 마피아들로부터 관심을 받는다. 그러나 정작 그는 조직에 합류하는 것을 한사코 사양한다. 호탕하지만 순박하고 가정적인 사내인 그는 아내와 자식들을 사랑하고 주변의 친인척들과 어울려 소시민적인 삶을 지향한다.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백인이면서도 앵글로 색슨계 주류로부터 밀려난 소외된 집단이다. 이들에겐 더러운 마피아 집단이란 딱지가 붙어있다. 하지만 주인공 토니는 마피아 집단과는 거리를 유지하며 소시민으로 살아간다. 그는 실직한 기간 동안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셜리 박사 연주 여행에 동반한다.

주인공 토니와 셜리 박사의 만남은 서로를 향한 선입견을 깨는 일부터 시작된다. 셜리 박사는 흑인이지만 대중적인 흑인 재즈음악가의 음악은 통 모르는 클래식 연주자이다. 조용하고 우아한 말투와 복장,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는 훌륭한 연주, 그의 삶을 관통하고 있는 몸에 밴 매너는 주류의 것들이다. 유일하게 그가 가지지 못한 것은 하얀 피부색이다. 탁월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그 한 가지 이유로 그는 외롭고 고립된 생활을 한다. 셜리 박사의 거처가 카네기홀의 위층에 있다는 설정은 이에 대한 은유이다. 스토리가 전개되며 해결사이자 운전사로 고용된 토니에 대한 인상도 해체돼 간다. 거친 이면에 따듯한 정서와 유머 그리고 가정적인 면모가 드러난다. 냉철한 이탈리아계 마피아의 스테레오 타입과는 거리가 멀다. 두 주인공의 공통점은 일반적인 편견과 선입견에서 벗어난 존재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경계인들이다.

그들이 여행을 떠나면서 나눈 대화 역시 매우 인상적이다. 토니의 아내가 일부러 산 셜리박사의 앨범 ‘지옥의 오르페우스’를 토니는 고아들이라고 잘못 읽고 아는 체 한다. 오르페우스(Orpheus)와 고아(Orphan)의 철자를 구분하지 못한 것이다. 바로 이 대화는 영화의 골계가 된다. ‘그린 북’은 오르페우스 신화를 전복적으로 차용하고 있다. 너무나 뛰어난 리라 연주자 오르페우스는 죽은 아내 에우리디케를 지하의 신 하데스로부터 데려온다. 하데스는 오르페우스에게 에우리디케를 내주면서 한 가지 조건을 내건다. 지하의 동굴을 빠져나가는 동안 에우리디케를 돌아보면 안 된다는 금기다. 그러나 오르페우스는 마지막에 참지 못하고 뒤돌아보고 만다. 아내는 이내 돌로 굳어버린다. 신화의 내용처럼 영화에서도 셜리 박사와 토니는 버밍햄에서의 마지막 연주를 완수하지 못한다. 음반사와 계약은 연주 투어를 모두 마쳐야 나머지 급여가 지급되지만, 이들은 부당한 차별에 맞서 연주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신화에서 자신의 잘못으로 아내를 영영 잃게 된 오르페우스는 자책의 세월로 슬픈 곡을 연주하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이들은 연주를 거부함으로써 투어를 완성한다. 금기를 깸으로써 금기에 맞선 것이다. 어쩌면 셜리 박사는 버밍햄에서 마지막 연주를 거부하기 위해 투어를 하였는지도 모른다. 제도적으로 일상적인 모욕을 가하는 이들에게 항거의 방식으로 공연을 무산시키기 위해 그 먼 길을 돌아서 온 셈이다. 자발적으로 금기를 깬 전복적 오르페우스들은 금기를 넘어선 실천적 경계인들이다. 외로운 경계 안에 갇혀 있던 고아들은 서로의 존재를 의지하게 되면서 마침내 그들을 규정짓는 편견의 틀을 깬다. 두 주인공의 방식은 달랐지만, 궁극적으론 하나로 합쳐져 이제 세상의 변화를 도모한 것이다.

주목해야 점은 금기를 깨고자 세상 밖으로 나선 셜리 박사가 정작 토니에게 운전 중 정면을 주시할 것을 수시로 요구한다는 것이다. 수다스럽고 수선스러운 토니는 끊임없이 뒤돌아보면서 셜리 박사에게 말을 걸고 자극한다. 이는 경계에 선 이상주의자 오르페우스 셜리 박사에게 금기를 깰 것을 독려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두 사람의 조화는 투쟁가와 생활인을 선택한 각각의 경계인들의 조합을 이끌어낸다. 투쟁의 도그마를 수행하기 위한 투사의 의지와 생활인으로서 경계에 선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의 정서가 버무려지며 그들을 감싸고 있는 틀이 깨지고 새로운 틀을 만들어 간다. 구질서를 깨고자 하는 의지와 소시민의 삶이 별개가 돼서는 안 되는 이유다. 쉬워 보이진 않지만 실천 가능한 모델이다. 이와 같은 점에서 ‘그린 북’은 매우 정치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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