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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의 복싱비화] 제주복싱의 역사와 사우스포 킬러 고희룡

[조영섭의 복싱비화] 제주복싱의 역사와 사우스포 킬러 고희룡

기사승인 2019. 02. 19.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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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본 -2015년 대한체육회 시상식에서 공로상
2015년 대한체육회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수상한 고희룡.함상명.박시헌(왼쪽부터) /조영섭 관장
오늘 복싱비화의 주인공은 한반도 남단의 섬에 위치한 제주도 출신의 고희룡이다. 제주도는 서울의 2.5배의 면적에 60만의 인구를 가진 섬으로 삼국시대에 탐라국으로 불리던 해상왕국이었다. 신라 선덕왕때 주변에 경계해야될 9개국을 불교의 힘으로 제압 하기위해 황룡사 9층탑을 세웠는데 4층에 탐라가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니 당시 국력을 미뤄 짐작할 수 있겠다. 이런 역사를 지닌 제주도는 초창기 한국 복싱 역사에서도 핵심적인 인물인 현해남, 한규철 선생의 본향이다. 현해남은 11살 때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1934년 16세에 프로에 데뷔, 18세에 일본 밴텀급 챔피언에 올랐고 이후 미국무대에 원정 강렬한 연타를 쏟아내며 일약 동경의 태풍이라는 닉네임을 얻었다. 이후 일본복싱의 권성이라 불리는 피스톤 호리구찌를 제압한 경기는 압권이었다. 1954년 20살 때 일본 복싱계에 투신한 한규철은 1957년 일본챔피언에 오른 후 9차 방어에 성공한 후 서강일과 대결에서도 판정승을 거둔 실력파였다. 후에 페더급 세계챔피언 데비 무어와 다까야마라는 일본 이름으로 두차례 격돌했는데 데비 무어는 1952년 헬싱키 올림픽 8강전에서 한국의 강준호에게 패한 바로 그 복서였다.

1960년대는 남재주군 서귀포출생인 김성은이 1965년부터 1973년까지 8년동안 페더급 국가대표로 활동했다. 국내에서는 김현치, 유종만에게 단 2패만 기록하면서 국제대회 최다 금메달인 7개를 획득한 아시아 챔피언이었다. 그의 바통을 이어받아 1980년대 출현한 복서가 국제복싱협회 (AIBA) 선수위원을 5년간 엮임한 고희룡 제주연맹 부회장이다. 1961년 제주시 구좌읍 하도리 출신으로 부산 전자공고 졸업반인 1979년 1월 뒤늦게 복싱에 입문했다. 그는 수업이 끝나면 저녁 8시에 버스를 타고 부산 광무체육관에 도착, 훈련한 후 귀가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하지만 운동신경이 뛰어났던 그는 그해 9월 세계청소년대회 선발전에 페더급으로 출전해 준결승까지 올랐지만 조규남에게 패했고, 1979년 11월 전국우승권대회에서 입문 10개월만에 값진 첫 우승을 차지했다. 동명대학에 진학한 1981년에는 대통령배 결승에서 전남 대표 진행범에 접전 끝에 패했지만 1982년에는 제6회 김명복박사배에서 한국체대와 동아대가 7체급을 독식하는 가운데 라이트급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사본 -친구이자 라이벌였던 고희룡
친구이자 라이벌였던 고희룡(왼쪽)과 이현주 전남체고 교사 /조영섭 관장
그 해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서 준결승에서 현 대표인 이현주와 격돌 치열한 접전 끝에 예상을 뒤엎고 판정승을 거두는 이변을 연출했다. 육상선수 출신의 이현주는 목포대 재학시절 1980년 한미국가대항전, 1981년 인도네시아 대통령배와 필리핀 마르코스배에서 3관왕을 차지한 베테랑 국가대표였다.

고희룡은 1983년 상무에 입대하면서 복서로써 꽃을 활짝 피웠다. 김창석 감독의 헌신적으로 지도로 고희룡의 잠재력이 폭팔한 것이다. 1983년 로마월드컵 2선발전에서 라이트 웰터급에서 우승을 필두로 인도네시아 대통령배와 킹스컵 국제대회에 태극마크를 달고 출전했다. 자신의 복싱역사에 정점에 섰던 1984년 LA올림픽 최종선발전 최종결승에서 사우스포 김동길과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박빙의 승부 끝에 분패했다. 그해 7월 제5회 템버국제대회에 참가한 고희룡은 준결승에서 유럽대표 마틴 파넨에게 RSC, 결승에선 미국대표인 헨리 아나야에 판정으로 승리, 우승을 차지해 올림픽에 출전하지 못한 아쉬움을 달랬다. 마치 서울대학에 1982년 수석 입학한 원희룡 현 제주특별자치도 도지사가 운전면허 시험을 3번째 도전해 합격했듯이 그도 3번째 도전 만에 국제대회 첫 금메달을 수확했다. 당시 템버국제대회에 미국대표로 참가한 핵주먹 타이슨도 헤비급에서 우승, 이듬해 프로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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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템버대회 우승한 고희룡 /조영섭 관장
그해 12월 제1회 재팬컵 대회에서도 우승하며 국제대회 2관왕을 차지한 고희룡은 1985년 인도네시아 대통령배에 출전한데 이어 1985년 월드컵선발 최종결승에서 또다시 숙적 진행범에게 패한 후 전국체전을 끝으로 복싱을 접었다. 제주 고씨 고희룡 집안은 수재 가문이었다. 명석한 두뇌를 복싱에 활용한 그는 자타공인의 국내 최고의 사우스포 킬러로 명성을 날렸다. 국가대표 출신의 사우스포 복서 김기택, 이봉래, 송경섭과 7차례 맞대결을 펼쳐 전승을 거둔 것이다. 필자가 사석에서 비법을 물었다. 고희룡은 “결정타는 레프트훅이지.. 삼각형은 예각 직각 둔각 등 3가지 각(角)으로 분류되는데 라이트 스트레이트를 가볍게 툭 던지면 상대가 피할 때 직각과 둔각 그사이 즉 120도 각도에 왼손 훅을 마치 문고리 잡아 틀듯이 회전시키면서 가격 하는거야. 실제로 수많은 이미지 트레이닝과 시행착오에 의한 학습의 결과물이었어”라고 말했다. 재미있는 사실은 삼각형의 기본원리를 처음 밝혀낸 수학자 피타고라스도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BC 588년 고대올림픽 복싱 금메달 리스트란 사실이다. 수학과 복싱에 묘한 함수관계가 있을 듯하다.
사본 -96년 국가대표선발전에서 우승
1996년 국가대표선발전에서 우승한 이창윤과 그의 스승 고희룡(오른쪽) /조영섭 관장
1990년 8월 WBC 슈퍼밴텀급 타이틀을 벌였던 상무 후배 이기준은 사우스포 챔피언 폴 벵키와 세계타이틀전이 결정되자 가장 먼저 고희룡에게 긴급 SOS를 보내 원포인트 레슨을 요청했던 일화도 있었다. 이기준은 일주일간 경기도 모처에서 고희룡에게 비밀리에 사우스포 잡는 특훈을 받고 타이틀 쟁탈전을 펼쳐 예상외로 선전했지만 12회 역전 KO패로 타이틀 획득에 실패했다. 하지만 경기 후 과외선생 고희룡에게 감사한 마음을 잊지않고 전달했다는 후문이다. 은퇴 후 고희룡은 1986년부터 제주도에서 체육회 순회코치로 10년간 봉직하면서 김용남, 이창윤, 신진수 등 국가대표 선수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이창윤과 신진수 모두 사우스포란 사실이다. 역(逆)으로 스승 고희룡은 사우스포인 이들에게 자신과 같은 정통파복서 잡는 비기(秘技)를 전수했다. 이창윤은 1996년 대표선발전에서 정통파 복서들을 차례로 쓰러뜨리며 우승을 차지했고, 1997년 파키스탄 카라치에서 벌어진 퀘어드 에어파잠 국제복싱대회 라이트 웰터급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의 종합 2위 달성에 견인차 역할을 했다.

현재 고희룡은 현재 남녕고 2학년인 이신우라는 꿈나무를 주목하고 있다. 중3때 협회장기 소년체전 대통령배 등 3관왕을 차지했고 전년도에도 전국체전과 주니어 선발전 웰터급에서 각각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차세대 제주복싱을 이끌어갈 유망주다. 끊임없이 제주복싱의 명맥을 유지하기위해 고군분투하는 고희룡 부회장을 비롯한 모든 제주 복싱인에게 경의를 표한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서울시복싱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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