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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영화 ‘라스트 미션’, 어느 자유의지론자의 고백

[칼럼] 영화 ‘라스트 미션’, 어느 자유의지론자의 고백

기사승인 2019. 03. 19. 1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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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90세 노장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과 주연을 맡은 영화 ‘라스트 미션’이 국내 개봉됐다. 영화의 원제목은 ‘The Mule’이다. Mule의 사전적 의미는 노새인데, 이는 은어로 ‘마약운반책’을 지칭한다. 영화의 제목처럼 극 중 주인공 얼은 마약조직에 포섭돼 미국남부 텍사스 국경도시 엘패소에서 중부 일리노이 최대도시 시카고까지 마약을 운반한다. 실제사건에서 모티브를 가져왔다는 영화에서 얼의 나이는 87세 노인이다. 한국전쟁참전용사 휘장을 차에 붙이고 다니는 노인을 의심하는 경찰은 없다. 연방마약단속반의 수사망도 보기 좋게 피한다. 이보다 좋은 마약운반책은 없어 보인다.

주인공 얼은 평소 제임스 스튜어트의 어투를 흉내 낸다. 얼은 그와 조우하는 극 중 인물들을 통해 제임스 스튜어트를 잘 따라한다는 말을 두 번이나 듣는다. 지미라는 애칭으로 불리는 스튜어트는 히치콕의 ‘이창’과 ‘현기증’으로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미국을 대표하는 배우다. 스튜어트는 2차 세계대전에 폭격기 조종사로 복무한 바 있는 참전용사다. 그에 어울리게 배우로 활동하던 시기에도 일관된 정체성을 가지고 공화당을 추종한다는 사실을 공공연히 밝힌 바 있다. 배우라는 화려한 직업, 그리고 수려한 겉모습과는 달리 가정적인 인물로 알려진 미국보수주의 아이콘으로 각인된 유명인사다.

그러나 영화에서 얼이 흉내 내는 것은 스튜어트의 말투뿐이다. 그는 평생 가족을 돌보는데 소홀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흔이 가까운 나이에도 돈이 생기면 매춘을 하는 마초적인 면모를 숨기지 않는다. 사족처럼 보이는 이러한 신들이 중요한 이유는 이 영화가 얼이라는 인물을 통해 궁극적으로 가족과의 화해와 성찰을 도모하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기존미국보수주의가 표방하는 중요한 가치로서 가족주의에 대한 복원과는 분명한 목소리로 그 궤를 달리한다.

농장을 경영하며 평생 백합품종을 개량하고, 미국 전역에 자신이 재배한 상품을 직접 배달하며 사업적으로 성공한 얼은 인터넷으로 변화된 시장에 적응하지 못해 파산하고 만다. 급기야 그의 농장은 압류당하고 노쇠한 몸을 이끌고 찾아간 가족은 더욱 차갑게 그를 내몬다. 우연한 계기로 그는 마약운반책이 됐다. 마약운반을 통해 번 돈으로 손녀딸의 결혼식에 물질적 지원을 하고, 그녀가 미용학교를 졸업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화재로 더 이상 운영이 어려운 참전전우회 회관의 복구를 위해 큰돈을 쾌척한다. 멀어졌던 가족들과도 아주 조금씩 관계가 호전돼 간다. 그가 제공하는 물질적 지원은 그들을 서서히 결속하게 한다.

영화에서 가족주의를 지탱하는 것은 성찰과 회한의 정서가 아니라 경제적 요소다. 이 영화가 탁월하게 리얼리티를 구축하는 지점이다. 얼의 아내는 그를 다시 받아들이면서 돈 때문이 아니라고 한다. 반어적 표현이다. 일 때문에 자신의 결혼식에 조차 참석하지 않은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하고 12년간 외면하던 딸은 서서히 그와 자리를 같이한다. 얼이 법정에서 자신의 유죄를 인정하고 구금될 때 그의 가족들은 그의 농장을 잘 운영하겠다고 말한다. 얼이 마약을 운반해 번 돈과 그가 남긴 농장이 해체된 가족을 다시 결합하게 한다. 영화는 재산권에 기초한 자유주의식 가족주의가 무엇인지 행간에 깔아두고 단순하게 스토리를 이어간다.

가족주의를 국가적 차원으로 확장시킨 미국의 연방공화제를 공고히 한 링컨의 고향 일리노이를 영화의 배경으로 삼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읽혀진다. 링컨이 미국인들에게 위대한 것은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미연방을 공고히 했다는 점이지 노예해방을 주창했기 때문은 아니다. 이와 같은 배경은 얼을 길에서 우연히 만난 흑인가족을 니그로라 부르는 시대착오적인 인물로 그림으로써 미니멀한 방식으로 묘사돼 있다. 강력하고 변함없는 미연방의 가치는 여전히 백인 남성 노동자 중심의 공화당 신봉자들의 몫이고, 그들이 가부장제에 기초한 마초적인 면모를 숨기기 위해 가족주의가 원용돼온 미국의 역사를 클린트 이스트우드감독은 자신의 ‘메소드 연기’로 녹아냈다.

영화에서 얼은 마약운반책인 자신을 감시하는 마약 카르텔의 멕시칸 중간책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인생의 자유를 즐기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그의 말을 되받아치는 조직원은 당신이 인생을 즐기다 지금 우리 같은 사람 밑에서 일하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한다. 얼은 만나는 사람들마다 노인 특유의 조언을 하는데, 그들은 그의 말을 건성으로 듣는다. 혼잣말이 돼 버리는 그의 조언은 궁극적으로 얼이 자신을 향해 뱉어내는 독백이 되고 만다. 이는 평소 자유의지론자임을 밝힌 바 있던 클린트 이스트우드감독 자신의 회한과 고백에 가깝다. 그의 사유의 결론은 평생 신봉하던 자유의 가치가 ‘자본의 자유’로 변질된 지 오래되었다는 점을 깨달은 것처럼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얼은 교도소에서 백합을 가꾸다 화면의 왼쪽 프레임 밖으로 나간다. 회한의 세월을 되돌리고 싶은 주인공 얼의 감정선을 잘 담아내고 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감독이 이 영화에서 배경으로 삼는 2005년과 12년 후인 2017년은 조지 W 부시와 트럼프가 대통령을 맡게 된 공화당 집권기다. 영화 ‘The Mule’에는 거장이 아닌 한 보수주의 유명인사의, 이미 오래전 변질된 자유주의에 대한 회한과 고백의 정서가 녹아있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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