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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의 복싱비화] 하늘의 별이 된 허영모 “짧은 생, 잘 살다 간다”

[조영섭의 복싱비화] 하늘의 별이 된 허영모 “짧은 생, 잘 살다 간다”

기사승인 2019. 04. 16. 1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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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본 -잘살다 갑니다 란 유언을남긴 생전의 허영모 (1)
생전의 허영모 /조영섭 관장
엘리오트라는 영국 시인은 황무지라는 시에서 ‘4월은 잔인한 달’이라 말했다. 4월을 맞은 필자의 마음도 착잡하다. 올해도 장정구의 15차 방어의 대업을 완성시킨 극동체육관 임현호 트레이너와 박종팔, 백인철, 나경민과 함께 중량급의 한 축을 담당했던 신도체육관 노창환에 이어 1980년대 한국아마복싱의 황금기를 연 천재복서 허영모(한국체대)가 연달아 소천하면서 하늘의 별이 되었다.

특히 허영모의 이른 죽음은 그를 아끼고 사랑하는 많은 팬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허영모는(한국체대)는 1981·1983년 월드컵 은메달, 1982년 뮌헨 세계선수권 동메달과 뉴델리 아시안게임 금메달, 1984년 킹스컵 금메달, 1987년 아시아선수권 금메달을 획득하는 등 날렵한 잽과 속사포처럼 뿜어대던 스트레이트로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복서였다.

문성길과의 3연전은 아마복싱 역사상 최고의 빅매치로 세인들의 관심을 증폭시킨 경기였다. 1988년 서울올림픽 출전이 좌절된 후 은퇴한 허영모는 선수 생활 때 받은 트로피와 상장을 전부 폐기처분하고 일체 복싱과는 담을 쌓고 지내다 1989년 여천공단학원에서 운영하는 여도중학교에 공채로 들어가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러던 허영모는 2018년 10월 말 위암 말기 판정을 받고 투병생활을 해오다 지난 3월 향년 55세로 영면했다. 필자는 생전에 친구 영모를 두 차례에 걸쳐 취재했다. 2012년 5월 문성길 챔프와 동행해서 영모를 만났다. 여수에서 재혼한 아내가 운영하는 주점에서 3시간에 걸쳐 취재를 했다. 1989년 여수 여도중학교에 교편을 잡은 영모는 자신의 모교인 순천 금당고에서 음악을 담당했던 교사 김자경을 만나 그 해 결혼을 했다. 직후 태어난 아이가 군 복무 후 24살에 대뜸 한화그룹 시험에 합격해 입사했다고 흐뭇한 부정(父情)을 보인 그는 문성길에 대해서는 과거의 상흔(傷痕)이 남아 있었는지 다소 냉담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사본 -숙명의 라이벌 문성길과 허영모
숙명의 라이벌 문성길과 허영모(오른쪽) /조영섭 관장
그는 복싱과 접촉을 끊고 지내는 이유에 대해 “내 꿈은 국가대표를 거쳐 체육교사가 꿈이였기에 한국체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교직의 수순을 밟은 것 뿐이니 확대 해석은 하지말라”고 말했다. 필자와 같은 체급이었던 영모는 1983년 로마월드컵 국가대표 2차선발전 플라이급에서 우승한 필자와 최종선발전에서 맞대결이 예정돼 있었지만 당시 심영자 회장을 만나 프로행을 선언하는 바람에 맞대결이 불발된 작은 인연이 있었다. 영모는 2005년 아내의 장례식에 참석을 해준 문성길에게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것도 잊지 않았다

순천에서 교직을 접은 아내는 여수에서 피아노 학원을 개업해 한때 원생들이 문전성시를 이룰 정도로 번창했다고 한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유방암에 걸려 결혼 16년 만에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했다. 당시 어린 막내 딸이 엄마의 영전에서 목놓아 서럽게 울어 주변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는 후문이다. 무신론자 입장에서 보면 죽음으로 모든 것이 종결되는 인생은 비극이 아닌가 싶다. 당시 2남1녀를 둔 영모는 어린 자녀들 때문인지 첫 아내와 상처한지 2달 남짓만에 두 번째 아내를 맞이했다. 또 영모는 한 살 어린 이복동생이 있었는데 부친께서 호적을 잘못 올리는 바람에 형인 영모가 65년생으로 동생이 64년으로 기재된 에피소드를 이야기하며 파란만장한 가족사에 대해서도 입을 열었다. 영모는 귀공자 같은 외모와 달리 등록금도 낼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에 돌파구를 찾으려고 복싱에 입문해 입신양명(立身揚名)을 이뤘던 과거에 대해서도 설명해줬다.

2015년 11월에도 영모가 여수에 내려오라고 전갈이 와서 두 번째 취재를 나섰다. 이번엔 혼자 내려갔다. 역시 아내가 운영하는 주점이었다. 영모 옆에는 골프에 입문했다는 둘째 아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는 치과를 운영하는 선배가 치아를 무료로 교정해 줬다면서 환하게 웃었다. 술잔을 기울이면서 영모는 한국의 정상급 복서에 대한 평론을 시작했다. 장정구와 박찬희를 수준 높은 복싱을 구사하는 아트복서로 칭하며 가장 높은 평점을 줬고 홍수환과 유명우에 대해서는 자신이 맞대결해도 스타일상 충분히 제압할 수 있는 상대라 평했다. 또한 3연패 한 문성길에 대해서도 단조로운 경기운영능력을 예로 들며 그다지 높은 평점을 주지 않았다.
사본 -1983년 로마 월드컵에서 금과은을 합작한
1983년 로마월드컵에서 금과 은을 합작한 신준섭과 투병중이던 허영모 /조영섭 관장
사실 문성길과 허영모의 3연전은 한국 아마복싱 사상 최고의 명승부였다. 특히 1985년 7월 벌어진 두 번째 대결이 펼쳐진 문화체육관에는 입장권 매매 문의전화가 쏟아졌을 정도였다. 복싱협회에서는 티켓판매에 따른 잡음을 없에기 위해 모든 표는 당일 10시에 현장 판매로 이뤼진다고 공표하자 삽시간에 1장에 1500원 하던 티켓 1500장의 일반권과 3000원에 달하던 일반권 200장이 금새 바닥을 드러냈고, 아마복싱사상 최초로 암표상까지 등장했다. MBC TV에서는 700만원의 중계료를 지불하고 실황중계를 했다. 영모는 페스트 스타터 답게 1회 2차례 다운을 탈취하는 등 우세하게 경기를 펼쳤다. 슬로우 스타터인 문성길이 발동이 걸리기 시작한 3회 영모는 습관처럼 클린치를 했다. 이에 당시 주심인 조석인씨는 스톱을 하고 파울을 선언하려했지만, 영모의 입에서 ‘선생님 한번만 봐주세요’말이 불쑥 라는 튀어나왔다. 심판 조석인은 차마 파올을 줄수 없었다. 이 사실은 생전의 조석인 심판이 필자의 둔촌동 체육관에 김원전 전북복싱협회 부회장과 직접 방문해 들려준 비화다. 결국 그 경기도 2-3으로 허영모의 판정패였다.

허영모는 필자에게 가장 좋아하는 선배로 신준섭을, 친구로는 페더급 국가대표인 박형옥을 꼽았다. 투정을 부리고 쉽게 토라지는 좁은 성품을 지닌 자신을 감싸주고 관대하게 대해준 고마운 복서들이라고 소회를 밝혔다.
사본 -떠나가는 친구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는 박형옥
떠나가는 친구에게 마지막 작별인사를 하는 박형옥 /조영섭 관장
영모는 임종을 일주일 앞두고 2남1녀를 모두 불려 오찬을 함께하고 주변정리를 하면서 ‘짧은 생이지만 잘 살다 간다’란 말을 유언처럼 남겼다. 살고 있던 아파트는 둘째 아들에게 주고 퇴직연금은 일시불로 수령해 가족들에게 골고루 분배하기로 결정을 했다. 영모는 마지막 순간까지 의연함과 담대함을 잃지 않았다. 또 냉철하면서 침착한 모습을 보였다. 그의 마지막 모습을 지켜본 박형옥의 회고다. 7년 2개월간 화려한 국가대표 선수생활과 함께 안정된 교직에서 30년을 무탈하게 보내다 예고없이 찾아온 암이라는 불청객에 의해 당대 최고 복싱 고수 허영모는 신준섭, 고희룡, 박형옥 등 동료 선후배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렇게 떠나갔다. 우리 인생사를 반추해보면 인간의 불행이나 행운이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변덕스러운 것임을 알수 있다. 인생이란 느끼는자에게는 비극 생각하는자에게는 희극이란 브뤼에르의 말이 생각난다. 편히 영면하시게, 친구.

<문성길복싱클럽 관장·서울시복싱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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