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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의 복싱비화] 복싱 유망주에서 역술인으로 변신한 박윤수

[조영섭의 복싱비화] 복싱 유망주에서 역술인으로 변신한 박윤수

기사승인 2019. 05. 28.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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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술인 박윤수
복싱 유망주에서 역술인으로 변신한 박윤수와 WBC 슈퍼플라이급 챔피언 염동균 /조영섭 관장
복싱이란 종목에서 30년이 넘는 세월에 종사하다 보니 복서 출신으로 이색적인 직업을 지닌 분들에게 관심이 쏠릴 때가 있다. 이를테면 방송인 임성훈을 비롯해서 비둘기집을 작곡한 김기웅, 논개를 부른 가수 이동기, 국회의원 권노갑, 서울시장 염보현 등이 있고, 해외로 눈을 돌리면 필리핀 대통령을 지낸 페르디난도 마르코스와 짐바브웨의 대통령 로버트 무가베, 195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복서출신이다.

오늘 소개할 비화의 주인공은 현재 경기 포천에서 철학관을 운영하는 전 프로복싱 웰터급 유망주였던 박윤수다. 그는 1960년 파주출신이다. 파주는 1978년 유고 베오그라드 세계선수권에서 최초의 동메달을 획득한 김정철을 비롯해서 동양 주니어플라이급 챔피언 정선용과 WBC 슈퍼밴텀급 8위인 이기준이 나고 자란 곳이다. 박윤수는 자택이 있는 신사임당과 이율곡 선생의 묘소가 있는 법원리에서 아침 로드웍을 할때면 가끔씩 마주친 김정철이 원포인트 레슨을 해줬던 추억이 생각난다며 해맑게 웃었다. 또 이곳은 방송인 황인용과 배우 최민수의 부친인 최무룡의 고향이기도 하다. 내가 박윤수 선배에게 최무룡 그분이 1928년 무진년 용띠여서 최무룡이라고 작명했다고 말하자 박윤수는 역술인답게 진즉 이사실을 알고 있었다며 의미있는 미소를 띄웠다. 1979년 프로에 뛰어들어 1980년 MBC 글러브 등을 통해 9전 8승 7KO승 1무를 거둔 정교하면서도 묵직한 펀치로 제2의 황충재로 급부상 중 국내타이틀을 목전에 두고 갑자기 은퇴를 선언해 복싱계를 안타깝게 했던 복서가 바로 박윤수다.
사본 -초창기 동두천에서 철학관을 오픈할때의 역술인 박윤수
초창기 동두천에서 철학관을 오픈할때의 역술인 박윤수 /조영섭 관장
그는 운동을 시작하기 전인 중학교 때부터 심취해있던 역술인이 되고자 복싱 유망주 딱지를 떼어버리고 역리학의 대가인 이청산 선생의 문하생으로 입문했다. 그때가 1987년으로 그의 나이 28세였다. 박윤수는 이청산 선생께서 역리학의 길을 걷는 자신에게 내던진 소중한 금언을 지금도 또렸이 기억하고 있었다. ‘목표를 설정하고 그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계획을 수립하라. 목표가 없다면 이 세상에서 무엇인가가 이뤄질 확률이 아주 낮다. 그리고 그 목표가 너에게 소중한 의미가 있어야한다. 계획은 반드시 성공할 것이라고 확신을 가져라.’ 박윤수는 이청산 선생의 가르침대로 목적의식을 갖고 역리학의 모든 것을 터득하기 위해 지극정성으로 명리보감, 연해자평, 적천수, 궁풍보감 등 역학서적을 탐독했다. 그리고 실전경험을 쌓기 위해 몇달씩 지방을 순회하면서 절차탁마했다. 불성무물(不誠無物) 이라했다. 정성이 없으면 이뤄지는 것이 없다고 했다. 결국 박윤수는 1992년 7월 이청산 선생의 수제자로 떠오르며 실력과 능력을 인정받았다. 엄한 스승 밑에서 체계적으로 역술을 수학한 보상이었다. 역술인 이청산 선생과 그의 제자 박윤수를 생각하니 호부호자(虎父虎子)단어가 생각난다. 직역하면 호랑이 아버지에 호랑이 아들의 뜻을 지닌 말이다. 그는 짧은 현역시절 이었지만 선수생활 때 익힌 인내심이 큰 역할을 했다고 피력했다. 현재 사단법인 역술인협회 정회원이자 포천지회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박윤수는 1990년 경기도 동두천에 역리학 사무실을 차리고 역술인으로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며 30년을 맞이하는 올해 비로소 조금씩 개안(開眼)현상이 일어난다고 겸손했다.

사본 -역술인 박윤수
역술인 박윤수 /조영섭 관장
가끔 일부 사람들이 역술인을 점쟁이들과 동격으로 생각하는데 역술인이 배우는 역학은 점쟁이들의 주술과는 천양지차로 격을 달리하고 있다고 그는 말했다. 역술인 박윤수는 “정해진 사주팔자는 고치지 못한다 하지만 운명은 자신의 노력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바꿀수 있다”고 의미심장한 말을 내뱉는다. 일순간 ‘운명아 비켜라. 내가 간다’는 누군가의 어록이 생각났다. 박윤수와 호형호제하는 WBC 슈퍼밴텀급 챔피언 염동균은 막내동생 같은 윤수가 복싱을 접고 역술인의 길을 걷겠다고 말할땐 참으로 우려를 많이 했는데 힘든고비 잘넘기고 새로운 분야에서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이 신통방통하다며 파안대소했다. 박윤수는 KBI 생활 체육대회에 참관하면서 인연을 맺은 1985년 대학가요제 대상 수상곡 ‘저 바다에 누워’를 부른 선배 김장수와도 격의없이 지내는 등 인맥의 폭이 넓은 역술인이다. 그의 장점은 균형감각을 잃지않고 겸손하게 사람을 대하는 자세다. 그래서인지 그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격의없이 조화를 이룬다. 김장수씨도 부산 동의대에서 체육학을 전공한 유명가수 출신이기에 예체능계에 종사하는 분들은 체육인들과 해와 달처럼 음양오행에 맞는 인연이라고 그는 말한다. 역술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니까 문득 유명 역술인인 백운학 선생에 대한 비화가 생각난다. 김종필의 증언록 소이부답을 보면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백운학은 관상을 잘보기로 소문난 역술인이었다. 5·16 직전 찾아 온 김종필을 힐끗보더니 한마디한다. “혁명하시는군.” 깜짝 놀란 김종필에게 “됐어요. 걱정마세요. 혁명하겠다고 얼굴에 쓰여져 있는데 뭘 그러세요. 때가 됐습니다. 아무도 말리지 못합니다.”라고 말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혁명에 성공한 1961년 7월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종필은 박정희 국가재건 최고회의의장이 있는 자리에 백운학을 불렀다. 혁명 성공을 일찌감치 내다본 인물 백운학은 박 의장에게 말했다. “한 20년 가겠는데요.” 박정희 의장은 빙그레 미소만 지었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자리가 파한 후 백운학이 속삭이듯 김종필에게 이야기한다 이상한 점괘인데요 그 무렵에 돌아가실 것 같아요. 김종필은 10.26이 터지고 나서는 더 놀랐다 한다. 불길한 예언이 들어 맞았기 때문이다.
사본 -가수 김장수와 역술인 박윤수 (1)
가수 김장수와 역술인 박윤수 /조영섭 관장
백운학은 과거 자유당 시절 신익희 선생에게 서울을 떠나면 변을 당한다고 예측했는데 그의 말대로 신익희는 호남유세를 떠났다가 열차 칸에서 세상을 떠났다. 더욱더 놀라운 사실은 그 천하의 사주팔자 달인 백운학이 1979년 1월 53세의 젊은나이에 심장마비로 급사했다는 사실이다. 상대방의 운명을 탁월하게 점지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운명에 대해서는 무지몽매한 현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될까. 나의 개인적인 생각은 인생에 앞길에 어떻게 전개될지에 대해 모르고 살아가는 것도 묘미라 생각한다. 물론 역술인을 깎아 내릴 의도는 추호도 없다. 마치 야구경기가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상황 속에 돌발 상황이 발생하면서 박진감과 스릴이 느껴지듯이 인생도 그렇게 살아보는것도 괜찮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자기 자신에 대해 알고 싶어 복싱을 접고 역술학에 빠져들었다가 천직이 되어버린 역술인 박윤수는 고통과 실의에 빠진 상담자에게 말한다. “만약 뚫고 나갈 수 없다면 돌아가는 길을 찾아라. 벽에다 머리를 계속 찧어대는 것으로 모든시간을 낭비하지말라 난해한 수학문제도 정답이 있듯이 돌이가면서 생각하면 길이보인다.” 그의 말을 경청하다보니 혜민스님의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것들 이란 저서가 생각났다. 역술인 박윤수의 건승을 빈다.

<문성길복싱클럽 관장·서울시복싱협회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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