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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껍데기도 오라

[칼럼] 껍데기도 오라

기사승인 2019. 05. 3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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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변호사 사진
이우근 법무법인 충정 고문 / 숙명여대 석좌교수
과일은 대부분 껍질을 깎아내고 속살만 먹는다. 껍데기를 버리고 알맹이만 취하는 것이 어찌 과일뿐일까. 온갖 세상살이에서 껍데기는 내실없는 겉치레일 때가 많다.

4·19의거로 솟아오른 자유·민주의 열망이 5·16 군사정변으로 좌절되고 ‘민족적 민주주의’라는 낯선 국정지표가 등장하자, 신동엽 시인은 “사월도 알맹이만 남고/ 껍데기는 가라…/ 백두에서 한라까지/ 향그러운 흙 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고 절규했다. 쇠붙이에 투사된 억압·독재·외세를 껍데기로 뱉어버린 시인은 ‘향그러운 흙’에 담긴 조국통일의 염원을 알맹이처럼 가슴에 품는다. 개발독재를 향해 ‘껍데기는 가라’고 꾸짖은 시혼(詩魂)은 암울한 시절에 피어난 한 떨기 처연한 저항의 꽃이었다.

하지만 껍데기도 껍데기 나름이다. 모든 껍데기가 다 쓰레기는 아니다. 껍데기는 알맹이가 잘 익을 수 있도록 감싸고 보호해준다. 사과·복숭아·포도처럼 아예 껍질째 먹는 것이 건강에 좋은 식품도 꽤 많다. 쌀도 낟알의 안팎껍질을 모두 벗긴 백미보다는 껍질의 씨눈과 호분층을 남긴 현미가 더 많은 영양소를 품고 있다. 뿐만 아니라 벗겨낸 껍데기도 나름대로 쓸모가 많다. 최근 영국의 디자인과학연구팀은 게·가재·새우 등 갑각류 껍질에서 뽑아낸 키틴을 원료로 생분해와 재활용이 가능한 바이오 플라스틱을 개발했다.

알맹이만 소중한 것이 아니다. 알맹이와 껍데기가 함께 있어야 온전한 생명체가 된다. 국가도 생명체처럼 생성·발전 혹은 퇴행·소멸하는 과정을 밟아간다. 시인이 ‘껍데기는 가라’라고 호령한 쇠붙이는 국민의 자유와 인권을 억압하는 철권통치를 가리키는 것이었지, 나라를 지키는 안보체제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을 터이다. 그런데 지금은 핵무기와 미사일의 위협 앞에서도 낭만적 평화의 신기루에 눈멀어 방어적 군사훈련조차 평화의 장애물인 것처럼 여기는 경향이 짙다. 마치 안보를 향해 ‘가라’고 꾸짖는 듯하다. 자유·인권이 알맹이라면, 안보는 그 알맹이를 보호하는 든든한 껍질이다. 안보의 껍질 없이는 자유·인권의 알맹이도 없다.

온 나라에 번져가는 진영 싸움이 갈등 수준을 넘어 거의 내전상태에 이르렀다. ‘내 편은 알맹이, 네 편은 껍데기’라는 편협한 갈라치기나 ‘알맹이는 선, 껍데기는 악’이라는 눈먼 이분법은 생명의 신비를 모르는 어리석음일 따름이다. 알맹이와 껍데기는 한 몸이다. 알맹이 없는 껍데기는 속빈강정이나 다름없고, 껍데기 없는 알맹이는 생명력이 쇠약하다. 게다가 이즈음엔 알맹이와 껍데기의 구분도 선명하지 않다. 알맹이인 줄 알았는데 껍데기에 불과한 것이 많고, 껍데기처럼 보이지만 실은 알맹이인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날 경제개발에 몰두하면서 자유와 인권을 껍데기로 치부하던 사람들이 도리어 북한의 자유와 인권을 걱정하며 그곳의 경제난을 껍데기처럼 외면하는가 하면, 자유와 인권을 외치면서 경제개발을 껍데기처럼 여기던 사람들이 지금은 북한의 경제난을 걱정하며 그곳의 자유와 인권을 껍데기 보듯 한다. 알맹이 품듯 지녀온 신념도 정치적 필요에 따라 껍데기처럼 뱉어버리는 것이 진영논리의 천박한 민낯이다.

민족적 민주주의를 껍데기로 내뱉으면서 자유를 알맹이처럼 아끼던 인권투사들이 이제는 자유·인권보다 ‘우리 민족끼리’식 민족지상의 이념을 알맹이처럼 떠받들고 있다. 그래서인지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껍데기처럼 지워버리려는 움직임이 있지만, 자유야말로 천부인권의 알맹이이고 민주주의는 그 알맹이를 제도적으로 보호하는 알찬 껍질이다. 껍데기를 버린답시고 알맹이를 버릴까 걱정스럽다. 함부로 껍데기라고 단정해버리거나 내뱉을 일이 아니다. 그래서 다시 외친다. 알맹이 없는 속빈 껍데기는 가고, 알맹이 품은 실한 껍데기는 오라. 알맹이만 말고, 껍데기도 함께 오라. 내 편만 말고, 네 편도 함께 오라. 생명력 넘치는 통합의 공동체를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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