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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영섭의 복싱비화]‘작은 알리’로 불리던 국가대표 복서 박인규 가수로 컴백

[조영섭의 복싱비화]‘작은 알리’로 불리던 국가대표 복서 박인규 가수로 컴백

기사승인 2019. 06. 11.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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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본 -천호 체육관 임창용관장과 박인규
천호체육관 임창용관장과 박인규 /조영섭 관장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는 6월은 호국 보은의 달이자 장미의 계절이다, 절세의 미인 클레오 파트라가 애인 안토니오를 위해 마루에 깐 꽃도 장미꽃이고 나폴레옹이 죠세핀을 위해 침실에 뿌린 꽃잎도 장미다, 정열과 사랑을 상징하는 장미의 달 6월의 첫 복싱 비화의 주인공은 아마추어 국가대표 출신으로 1975년과 1976년 2회 연속 킹스컵 국제복싱대회 은메달 리스트인 노래하는 복서 박인규다. 박인규는 대영제국의 윈저공이 심프슨 부인과의 사랑을 위해 왕관을 버렸듯이 박인규도 복서로서는 이색적으로 가수로써 꿈을 이루기 위해 복싱 왕관의 꿈을 접은 이력을 지닌 복서다. 그런 박인규를 6월 어느 날 서울의 모처에서 청소년대표 역임한 국가대표 코치 출신의 임창용(동아대) 천호체육관 관장과 함께 만났다. 박인규는 1956년 전남 화순출신이다. 그는 1972년 서울로 상경, 남산공전에 입학과 동시에 남영동 동신체육관에 입관해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최초의 복싱메달 리스트인 한수안 선생의 체계적인 복싱수업을 받으며 성장했다. 이때 동문수학한 복서가 절친인 WBC 플라이급 챔피언 박찬희(동아대)다. 그 해 서울 신인대회 LF급 결승에서 중산체육관의 이화경과 치열한 타격전 끝에 3-2로 승리하며 첫선을 보인 박인규의 복싱은 후에 복싱 전문가들로부터 젊은시절의 무하마드 알리를 떠올리게 한다는 찬사를 받을 정도로 하이테크한 복싱을 구사했다.

박인규는 남산공전 2학년인 1973년 대통령배 시도대항전에 서울대표(플라이급)로 출전, 우승과 함께 최우수복서로 선정되며 성인무대까지 접수했다. 졸업반인 1974년에는 제3회 아시아 청소년 선소년 선수권대회(테헤란)에 한국대표로 출전, 한수위의 압도적인 테크닉으로 4전 전승(3KO)을 기록하며 금메달을 목에 걸었고 한국복싱의 미래로 주목받았다. 그 해 같은 동신체육관 소속인 박찬희(한영고)와 함께 동아대에서 러브콜이 들어왔지만 그는 실업팀 금강유리를 선택했다. 이후 밴텀급으로 월장해 1975년도 킹스컵 선발전과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국가대표로 발탁된데 이어 1976년 또 다시 킹스컵에 국가대표에 발탁됐다. 박인규는 킹스컵 대회에서는 2회 연속 은메달을 획득하는 탄탄한 입지를 구축했다. 박인규는 소위 황금의 체급이라 불리는 밴텀급에서 황철순을 비롯해서 김창석과 문명안, 임병진, 차상준, 박남철 등 역대급 복서들을 차례로 잡으며 밴텀급의 1인자로 위용을 자랑했다. 그가 꺽은 황철순은 올림픽에서 최초로 쿠바선수를 꺽은 베테랑 실력파였고 육군대표 김창석은 강력한 압박권투를 펼쳐 당대 최고의 클라스의 복서인 유종만(원광대)과 이거성(경희대)을 잡았던 1974년 테혜란 아시안게임 밴텀급 국가대표였다. 또한 전국체전 2연패를 달성한 문명안 역시 박찬희에게 생애 첫패배를 선물한 베스트 복서였기에 박인규의 복싱은 ‘놀랍다’는 말 외엔 수식할 수 있는 단어가 없어 보일 정도였다.

사본 -1978년 한국 밴텀급 챔피언에
1978년 한국 밴텀급 챔피언에 등극한 박인규 /조영섭 관장
하지만 그는 당시 플라이급 대표였던 강희용(작고)과 사소한 시비로 말다툼을 벌인 끝에 왼손에 치명적인 부상을 당해 퇴촌을 당하면서 상승세에 브레이크가 걸렸다. 이후 후유증으로 작은 알리 박인규의 천재복싱 광채는 서서히 퇴색해갔다. 이 부상은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밴텀급 최종선발전에서 난적 황철순에 고배를 마시고 5년간의 아마추어 선수생활에 종지부를 찍게 만드는 결정적인 단초를 제공했다. 박인규는 그 해 10월 이안사노씨를 매니저로 프로에 전격 데뷔했다. 하지만 박인규는 나비처럼 날았지만 벌처럼 쏘지 못하는 반쪽 선수로 전락했다. 1978년 4월 9전 전승(1KO승)을 기록한 그는 성동중앙의 박춘하를 꺽고 한국정상에 올랐다. 예전에 스커드 미사일처럼 터지는 강력한 한방은 상실한 아쉬운 한판이었다, 당시 ‘선데이서울’이란 잡지에서 ‘아마추어 국가대표 강타자 박인규의 손부상에 의한 KO 펀치상실’이란 제목으로 1면을 장식할정도로 주목받기도 했다. 박인규는 11전째 일본에 원정을 떠나 10전 전승에 7KO승을 기록한 제2의 파이팅 하라다라는 애칭으로 주목받았던 무라다 에이지로와의 경기에서 한차례 다운을 주고받는 명승부를 펼친 끝에 무승부를 기록하며 주가를 올렸다. 이후 박인규의 실력을 인정한 일본의 저명한 프로모터 아라시다는 박인규와 매니저 계약을 체결하며 당시 WBA 주니어 페더급 타이틀전 카르도나에 대결을 추진했지만 결정적인 순간 정순현이 카르도나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무산됐다. 하지만 박인규의 천재성을 안타깝게 생각한 선배복서 홍수환이 당시 WBC 밴텀급 챔피언 카를로스 자라테와 미국에서 대결을 추진하기 위해 매니저 역할을 담당하며 분주히 움직였지만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이에 동남아 복서와 대결이 수면 위로 오르자 ‘독수리는 파리를 잡지 않는다’는 명언을 남기고 1980년 9월 전격 은퇴를 선언했다,

사본 -노래하는가수 박인규
노래하는 복싱선수 박인규 /조영섭 관장
링을 떠난 박인규는 1981년부터 복싱 못지않은 노래실력으로 미사리 라이브 카페와 밤무대에서 노래를 부르며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단발머리를 한 곱상한 외모에서 중후한 저음과 바이브레이션으로 배호의 안개 낀 장충단공원을 열창할 땐 중년 여성팬들 사이에서 제2의 배호로 불리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가수 배호가 누구인가, 1971년 그가 29살의 나이로 무대에서 마지막 잎새를 부르며 쓸쓸하게 한 잎 낙엽처럼 떨어질 때 소복을 입은 수많은 여성 팬들이 장례식 대열에 통곡하면서 합류했을 정도로 사랑받던 전설적인 가수가 아니었던가, 실력을 인정받은 박인규는 이후 특급 개런티를 받으며 하루 10차례 이상 출연 섭외가 쇄도하는 등 상한가를 달렸다,

사본 -1989년 대뷔앨범 흙 수선화를 발표할때의 가수 박인규
1989년 대뷔앨범 ‘흙 수선화’를 발표할 때의 가수 박인규 /조영섭 관장
배호가 중절모를 쓰고 건방지게 멋있다는 찬사를 들으며 안개낀 장충단 공원을 부를때가 1967년 25살였는데 복싱을 접고 마이크를 잡고 무대에 뛰어든 박인규의 당시 나이도 배호와 같은 25살이었다. 사실 박인규의 노래를 듣기 전까지는 박인규의 필생의 라이벌였던 황철순의 ‘남진의 빈잔’ 천호체육관 임창용 관장의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 전칠성의 ‘나훈아의 잡초’등 노래를 제법 잘부르는 복서들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박인규의 노래를 들으면 그들과는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의 차이처럼 격차를 느끼면서 ‘아.역시 프로는 다르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1989년 박인규는 흙 수선화와 애수의 터미널을 타이틀 곡으로 정식음반을 내고 가수로 데뷔했다. 그는 가수 활동을 하면서 광진구 한강호텔 인근에 고풍이 감도는 라이브 레스토랑을 운영하는 등 박상규, 해바라기 등 친분이 두터운 동료가수들과 노래를 부르면서 사업을 번창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IMF라는 직격탄을 맞고 휘청거리기도 했다,

꾸준히 사업가로 활동해 온 박인규는 제2의 배호가 아닌 자신의 스타일을 정형화시킨 신곡을 발표하며 본격적으로 활동할 예정이다, 그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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