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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법농단 재판의 딜레마와 솔로몬의 역설

[칼럼] 사법농단 재판의 딜레마와 솔로몬의 역설

기사승인 2019. 06. 17. 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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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황석 교수
지난 현충일 다음 날, 대학을 제외한 각급 학교 대부분이 휴교했다. 아이들을 위탁할 곳이 마땅치 않은 부모들은 적잖이 힘들었다. 육아와 일을 병행해야 하는 직장인 부부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싶었다. 그러나 일선 학교의 연휴 정책이 일방적으로 잘못됐다고 몰아붙이기엔 뭔가 개운치 않은 게 있었다. 무엇보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심한 선생님들도 노동자로서 적당한 휴식이 필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필자와 같은 직종에서 교육을 담당하는 일을 하는 선생님들에게 공감 가는 부분이 있다. 그건 일종의 ‘경계적 위치’에 대한 경험이었다. 어느 쪽 편을 들어야 하는지 가끔 우리는 혼란을 경험하게 된다.

경계에 선다는 것은 딜레마와 직면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딜레마에 빠진 사람들의 유형은 권력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로 나누어 생각해 볼 문제다. 쉽게 말해 처한 이의 위치를 고려해 접근해야 한다. 자신이 통제 가능한 권력을 쥐고 있을 때 딜레마를 푸는 것은 일종의 의례로서 권력 행사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는 곧바로 다른 무엇을 버리는 행위임을 뜻한다. 선택의 기준은 이해관계에 있다. 선택적 행위를 통해 수반되는 이익과 손해를 따지게 된다. 권력 수행이 정당성을 확보하려면 손익의 기준이 바로 공공선에 있어야 한다. 말하자면 공리주의 입장에 서게 된다. 그러나 왕왕 정의의 문제가 발생한다. 자칫 희생제의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단순화시킬 수만은 없어 보인다.

권력을 가지지 못한 약자의 입장에서도, 딜레마적 상황에 부딪혔을 때 선택을 해야 한다는 점은 전자와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선택을 통해 야기되는 결과는 희생의 주체가 절반의 확률로 자신이 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완전히 다르다. 전자가 누구를 희생시킬 것인가의 문제로 수단이 된다면, 후자는 희생의 주어가 누가 되는가의 문제다. 다시 말해 아(我)와 타(他)가 구분된 양립된 질서의 경계에서 자기 자신을 어떤 목적을 향해 투척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게 된다. 확고한 주어의 입장에서 목적어를 선택하는 것과 불안한 위치에서 일종의 여격으로서 목적어를 향한 위치에 선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 된다.

위의 상황을 솔로몬의 재판을 예로 들어 설명하면 사실 그의 선택이란 기계적 형평에 있었다. 아이를 두고 진짜 엄마임을 주장하는 두 여인에게 내린 결론은 아이를 둘로 갈라 나눠 가지라는 판결을 내린다. 종종 판관은 존재를 소유의 영역에서 다룬다. 결과적으로 아이의 존재를 부정하는 비극을 원치 않았던 진짜 엄마는 역설적으로 아이를 포기함으로써 아이의 친엄마임을 스스로 증명했다. 아이가 죽기보다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하겠다는 의사표시를 함으로써 아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확인받게 된다. 아이러니를 유도함으로써 딜레마를 해결하려 했던 솔로몬의 지혜란 친엄마를 경계의 위치에 서게 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사법부가 딜레마에 놓였다. 지난 정권하에서 사법농단을 벌인 세력에 대한 재판에 현사법부의 수뇌부는 매우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듯하다. 권력을 사유화해 일선 재판에 개입하고 농단했던 일에 대해 응당한 법의 심판이 따라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사법부는 사법농단에 대한 재판에 개입하거나 가이드라인을 만든다는 오해를 벗어나기 위해 기계적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문제는 수뇌부 말고도 일선 법원의 입장 역시 매우 모호하다는 점이다. 실제 재판을 담당하는 하급심 법원도 권력을 가진 자의 선택인데, 자칫 강한 조직 논리로 무장한 엘리트사회의 수구적 판단이 후대의 역사에 오류로 기록되는 일은 없어야 할 것 같다.

사법농단 재판에 대한 사법부의 고민이 무엇인지 모르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재판처럼 기계적 중립이 가져올 결과가 누가 아기를 더 사랑하느냐의 문제처럼 해결될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일선 재판이 강한 유대감에서 출발한 정서적 동일시로 인해 엄중히 죄를 묻지 못하고 관용적인 태도를 보이고 마는 상황에 놓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 누구를 사랑하느냐의 문제라기보다 일종의 ‘자기애로의 회귀’가 될 수 있다. 주어와 목적어가 같다는 말이다. 지나친 자기애는 자신은 물론 주변을 멜랑콜리에 빠지게 한다. 그런데 우울하게도 우울(멜랑콜리)의 주체가 국민이다. 역사적으로 우울과 같은 불쾌의 반복은 그것을 끊어 버리고자 하는 충동으로 발현되기도 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작금의 사법농단에 대한 재판은 시대적 상징 투쟁이 됐다. 사법부 전체는 결자해지의 자세로 인식의 전환을 시도할 때이다. 지적능력을 겸비한 사람들일수록 타인의 문제엔 현명한 판단을 하나 자기 자신의 문제엔 어처구니없는 선택을 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솔로몬의 역설’이라고 한다. 사법부는 그와 같은 우(愚)를 범해서는 아니 될 일이다. 거리를 두고 자신을 바라보아야 한다. 사법농단의 피해자가 볼모로 잡힌 사법부뿐만 아니라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국민이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싶은 대상은 바로 ‘사법 정의를 실현하는 사법부’라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황석 문화평론가·한림대 교수(영화영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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