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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구자경 LG 명예회장, 현장 누비며 대한민국 화학·인재·전자 키웠다

故 구자경 LG 명예회장, 현장 누비며 대한민국 화학·인재·전자 키웠다

기사승인 2019. 12. 14.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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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 경영자 중 드물게 회장직 전까지 현장 경험 풍부
신제품 개발과 인재 육성을 통해 그룹 기틀 다져
구자경
구자경 명예회장(가운데)이 1980년대 럭키(현 LG화학) 청주공장에서 생산제품을 살펴보고 있다./제공=LG그룹
구자경 명예회장은 LG그룹의 창업 초부터 회사 운영에 합류해 1970년 그룹 회장에 취임할 때까지 20년간 생산현장을 지켰다. 이 때문에 한국의 2세 경영인 가운데 구 명예회장만큼 현장을 잘 알고 기술을 잘 이해하는 기업인은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구 명예회장은 LG의 모기업인 락희화학공업사(현재 LG화학)에서 럭키크림 생산을 직접 담당하면서 현장경험을 쌓기 시작했다. ‘이사’라는 직함에 어울리지 않게 손수 가마솥에 원료를 붓고 불을 지펴 크림을 만들고 박스에 일일이 제품을 넣어 포장해 판매현장에 들고 나가기도 했다.

◇ 풍부한 현장경험으로 LG화학·LG전자 등 계열사 키워
그는 밤에는 하루걸러 숙직을 하며 아침 5시 반이면 몰려오는 도매상들을 맞았고, 직원들이 출근하기 전에 공장가동을 준비해야 했다. 당시 잦은 모래바람에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허름한 야전점퍼에 기름을 묻히고 다니면 그의 모습은 영락없는 현장 근로자였다고 전해진다.

실제 배달 과정에서 뚜껑이 파손되는 일이 생기자 구 명예회장은 깨지지 않는 플라스틱 크림통 뚜껑 개발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플라스틱에 관한 풍부한 지식과 정보가 없던 때라 집 뜰의 가마솥에서 베이클라이트나 요소수지 등의 원료를 녹이면서 실험에 열중했었다.

구 명예회장은 락희화학과 금성사의 부사장에 이르는 동안 부산의 범일동공장, 부전동공장, 연지동공장, 온천동공장 등 시설확장의 중심에 서 있었다.

당시 구 명예회장은 설비를 점검하고 기계를 발주하는 등 공장 신·증축을 직접 해 내면서 화학·기계·전기 등에 관해 많은 지식과 경험을 습득하게 되었는데, 이는 후에 화학과 전자 사업을 발전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 시절 치약 튜브는 납 표면에 주석을 입히고 그 위에 인쇄를 했었는데, 생산이 뜻대로 되지 않자 구 명예회장은 과거 공장에서의 도금 경험과 주변 기술자들로부터 흘려 들은 단편적인 기술들을 모아 몇 차례 시행착오 끝에 냉간 압착 튜브 코팅기술을 개발하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락희화학에서의 플라스틱 가공 경험은 훗날 금성사의 성장에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플라스틱 가공에 필수적인 자체 금형 기술 확보와 인력 양성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이때 축적된 금형 역량을 바탕으로 라디오, 선풍기, 모터 등 당시로서는 높은 정밀도를 필요로 하는 전자제품의 금형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처럼 구 명예회장은 국내최초의 플라스틱 생활용품, 비닐제품, 라디오, 선풍기, TV 등 새로운 화학과 전자 제품의 탄생과 호흡을 늘 같이 해 왔다.

LG
1988년 11월, LG 인재육성의 요람인‘인화원‘ 개원 기념촬영/제공=LG
◇ LG그룹의 인재 육성 및 연구개발 초석 다져
구자경 명예회장은 또한 기술개발을 위한 연구 활동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70년대 중반 럭키 울산 공장과 여천 공장에는 공장이 채 가동되기도 전에 연구실부터 만들어졌다.

그는 대부분의 연구실이 각 공장 별로 소규모 형태로 운영되고 있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하고, 1976년 국내 민간기업으로는 최초로 금성사에 전사적 차원의 중앙연구소를 설립토록 했다. 이 곳에 개발용 컴퓨터, 만능 시험기, 금속 현미경, 고주파 용해로 등 첨단 장비를 설치하고, 국내외 우수 연구진을 초빙하는 등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투자가 집행되었다.

또 제품개발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산업 디자인 분야의 육성을 위해 1974년 금성사에 디자인 연구실을 발족시키고, 일본 등 디자인 선진국에 연수를 지원하는 등 전문가 육성에 힘썼다.

1979년에는 대덕연구단지 내 민간연구소 1호인 럭키중앙연구소를 출범시켰다. 여기서는 고분자·정밀화학 분야를 집중 연구하여 엔지니어링 플라스틱, ABS수지 등 다양한 신제품 개발로 플라스틱 가공산업의 기술고도화를 이끌었다.

이어 1985년에는 금성정밀, 금성전기, 금성통신 등 7개사가 입주한 안양연구단지를 조성하는 등 회장 재임기간 동안 70여 개의 연구소를 설립했다.

또 같은 해인 1985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제품시험연구소를 개설하고, 이곳에 가혹 환경 시험실, 한냉·온난 시험실, 실용 테스트실 등 국제적 수준의 16개 시험실을 갖춰 금성사 제품의 품질을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하게 했다.

구 명예회장의 이 같은 연구개발에 대한 신념 뒤에는 우리 기술로 우리 국민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우리나라의 산업과 기업의 수준을 한층 선진화해야겠다는 사명감이 담겨 있었다.

구 명예회장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생산기업을 시작하면서 항상 마음에 품어온 생각은 우리 국민생활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제품을 우리 손으로 만들어 보자는 것”이라는 뜻을 밝힌 바 있다.

구 명예회장은 기술 연구개발을 강조하면서 자연스럽게 우수 인재 유치와 육성에도 꾸준한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늘상 “연구소만은 잘 지어라. 그래야 우수한 과학자가 오게 된다”고 언급하곤 했다. 80년대 말 대덕연구단지에 LG화학 종합기술연구원 설립을 추진할 때도 구 명예회장은 프로젝트 출범 초기부터 우수 기술인재 유치를 위한 통 큰 투자를 신신당부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이 강력하게 추진한 기술 연구개발의 결과로 금성사는 19인치 컬러TV, 공냉식 중앙집중 에어컨, 전자식 VCR, 프로젝션 TV, CD플레이어, 슬림형 냉장고 등 영상미디어와 생활가전 분야에서 수많은 제품을 국내 최초로 개발해 국내 최고의 가전 회사로서 입지를 굳혀 나갔다.

당시를 회상하며 구 명예회장은 “1970년에 냉장실과 냉동실을 분리한 2중 구조의 ‘투 도어 냉장고’를 개발한 것과, 74년에 개발한 가스레인지, 77년 19인치 컬러TV를 생산한 것 등이 특히 기억에 남는다”고 밝히기도 했다.

컬러TV 생산은 1975년 구미 공단에 연산 50만 대의 대단위 TV 생산 공장이 준공되면서 본격화됐다. 구미 공장의 준공은 한국 전자 공업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할 정도로 우리나라 전자 공업 발전에 커다란 획을 긋는 일대 사건이었다.

당시 컬러TV는 국내의 컬러 방송 시기가 미정이라 국내 시판이 어려운 상황이었지만, 글로벌 기술 흐름에 뒤쳐지지 않고 해외 시장으로 진출해야 한다는 전략적 판단에 따라 전량을 미국 수출용으로 먼저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이후 우리나라 수출에서 가전제품이 차지하는 비중이 급격히 확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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