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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취왕자 별명 후옌룽, 한국에 작품기증 희망

비취왕자 별명 후옌룽, 한국에 작품기증 희망

기사승인 2020. 02. 09. 0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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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고궁박물원에 작품 영구 전시
귀한 보석으로 손꼽히는 비취는 가격이 상상을 불허한다. 품질이 웬만하면 다이아몬드보다 더 비싼 경우가 흔하다. 특히 미얀마산은 세계적으로도 알아준다. 이 비취에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장인의 예술혼을 입하면 그 가치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어진다. 부르는 게 값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장인은 세계적으로도 많지 않다.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라고 해도 좋다. 베이징을 주무대로 하면서 대만, 태국, 말레이시아 등까지 활동 반경으로 두고 있는 후옌룽(胡焱榮·53) 씨는 바로 이런 몇 안 되는 비취 가공 장인들을 대표하는 인물로 손꼽힌다. 그래서 별명도 비취왕자, 옥조(玉雕)대사로 불린다. 그의 작품이 베이징 구궁(故宮) 내 구궁박물원에 영구 전시돼 있는 것은 이로 보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 그를 만나 비취 공예의 세계에 대해 알아봤다.

후옌룽
비취왕자로 불리는 후옌룽 대사. 베이징 시내에 있는 그의 매장 겸 작업실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베이징=홍순도 특파원.
-젊은 나이에 벌써 대사라는 호칭으로도 불린다. 대사는 연륜이 많아야 할 텐데?
“나이는 많지 않으나 어릴 때부터 비취를 만지면서 살았다. 아버지가 미얀마에서 비취 광산을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연륜이 50년은 된다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주로 디자인만 하나 40대 초반 때까지는 직접 장인으로도 활동을 했다”

-미얀마 화교였다는 얘기인가?
“중국인으로 미얀마에서 태어났으니 그렇게 불려야 하겠다. 그러나 30대 초반에 태국으로 이주한 후 곧 대만으로 활동 무대를 옮겼다. 현재 베이징에서 매장과 작업실을 운영하고 있으나 대만을 비롯해 태국, 말레이시아에도 분점이 있다. 1년에 6개월 정도는 베이징 이외의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다”

-비취라는 것은 고가의 보석이다. 작품이 비쌀 수밖에 없을 듯한데.
“내 작품은 개인이 소장하기에는 버겁다. 웬만한 자본가가 아니면 누가 원하더라도 솔직히 팔지도 않는다. 하지만 나는 돈만 밝히는 장사꾼이 아니다. 예술을 우선시한다”

-작품을 기증했다고 들었다.
“베이징 구궁의 구궁박물원에 내 작품 두 점이 있다. 영구 전시하는 조건으로 기증했다. 가격으로 따지기 어려운 작품들이다. 돈만 생각했다면 기증하지 않았겠으나 공익 차원에서 흔쾌히 결단을 내렸다. 앞으로도 내 작품을 원하는 곳이 있다면 무조건 거부하지는 않겠다. 공익을 고려해 판단하겠다”

-유엔에 기증할 계획이 있다고 하던데.
“유엔은 인류평화를 위해 존재하는 곳 아닌가? 가장 공익적인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원한다면 기꺼이 기증하겠다. 세계 평화를 위해 내 작품이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얼마나 좋겠나?”

-한국에도 관심이 많다고 들었다.
“주위에 한국 친구들이 조금 있다. 이 친구들이 나에게 한국 민속박물관에 한 작품 정도 기증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더라. 한국이 원한다면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영구 전시를 해야 한다는 조건을 받아줘야 한다. 그러면 기꺼이 보내겠다”

-작품들의 수준에 대해 평가한다면?
“직접 내가 나서서 하는 작업은 오래 전에 내려놓았다. 다행히 내 디자인을 잘 구현하는 비취 장인들이 지구촌에 한둘 정도는 있다. 이들이 내 사상과 아이디어를 잘 구현해주고 있다”

-베이징 시내 매장 작품들의 가격도 만만치 않아 보인다.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려우나 한 작품 당 최소 1000만 위안(元·17억 원)을 한다고 보면 된다. 미국의 한 기업 오너가 1000만 달러에 사겠다는 작품도 있으나 내가 너무 헐값에는 팔지 않겠다고 했다. 그게 내 자존심이다”

후 대사는 대만에서 20여 년 가까이 활동한 탓인지 현지 사투리인 민난(閩南)어 억양이 강했다. 투박하게 들리기는 했으나 묘하게도 그게 그에 대한 신뢰를 더해주는 역할을 했다. 진정성도 더 돋보이게 만들었다. 또 그는 곧 50대 중반의 나이에 진입할 중년치고는 순수한 영혼을 가진 예술가처럼 보이기도 했다. 비취왕자 별명은 결코 괜한 게 아닌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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