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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우상의 계절

[칼럼] 우상의 계절

기사승인 2020. 03. 02.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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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근 변호사 사진
이우근 숙명여대 석좌교수. 변호사
아리스토텔레스의 <기관>이 이성적 연역논리학의 고전이라면, 베이컨의 <신기관>은 경험적 귀납논리학의 선구적 저술이다. 베이컨은 인간의 지성을 그르치는 편견으로 네 가지 우상을 들고 있다. ‘우물 안 개구리’처럼 바깥세상을 모른 채 독단적 선입견에 사로잡힌 동굴의 우상,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는 명제에서 보듯 세상만사를 인간중심으로 생각하는 종족의 우상, 장터에 떠도는 헛소문처럼 언어의 잘못된 해석이나 부적절한 사용으로 오류에 빠진 시장의 우상, 무대 위의 가짜 현실에 몰입된 관객처럼 그릇된 권위나 이론 따위를 무비판적으로 맹종하는 극장의 우상 등이다.

아이돌은 연예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문화·종교계에도 현란한 이벤트, 얄팍한 감성으로 팬클럽 같은 추종세력을 거느린 정치·문화·종교권력의 우상들이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국민의 일상과 미래세대에 가장 해로운 것은 정치권력의 우상이다. 또한 우상의 손길이 연출하는 판타지에 넋을 잃고 우상찬가를 목청껏 외쳐대는 광신의 무리도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우신예찬(愚神禮讚)은 진실의 소리가 아니다. 베이컨의 말처럼 ‘진리는 특정한 시대가 누리는 불확실한 행운이 아니라 영원한 자연과 경험의 빛으로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17세기 영국인이 언급한 ‘특정한 시대가 누리는 불확실한 행운’은 21세기 한국인들에게 섬뜩한 경고처럼 다가온다.

불확실한 행운으로 권력을 누리는 개인이나 특정 집단의 소신이 시대정신으로 자리 잡으면 결국 진리를 거스르는 동굴의 우상으로 전락하기에 십상이다. 베이컨은 ‘옛 사람이 가르친 바른 길을 벗어나지 않고 동시대인이 제창한 혁신도 경멸하지 않는 중용’ 즉 보수와 진보의 융화를 강조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융화는커녕 도리어 극단적인 대립과 갈등으로 거의 내전에 가까운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종족의 우상은 원래 사람 중심의 ‘인간적 편견’을 뜻하는 것이지만, 이념·정파·지역·세대·계층으로 갈가리 찢긴 이 사회의 파편들은 마치 저마다 별개의 종족인 것처럼 서로를 적대시하는 ‘비인간적 편견’으로 피터지게 싸우는 중이다. 베이컨도 알지 못했던 별종의 우상들이 새롭게 출현한 듯하다.

경제의 논리를 이념으로 주무르고, 외교의 원칙을 정략으로 재단한다. 정치과정은 사법판단에 떠넘겨지고, 사법독립은 권력의 손에 맡겨진다. 삼권분립은 교과서에 활자로만 남아있을 뿐인가. 권력분립이 깨진 사회에서는 자유와 인권이 보장될 수 없다.

힘없는 대중은 ‘영원한 자연과 경험의 빛’이 차단된 우상의 동굴에 갇혀 원리주의의 도그마를 암송하는 광신의 무리로 사육(飼育)된다. 물론 반대의 목소리는 철저히 봉쇄된다. 전체주의 공포사회다. 원리주의자들에게는 법과 정의도 도그마의 종속가치에 지나지 않는다.

저들에게 필요하면 증거인멸도 증거보존으로 둔갑하고, 저들에게 거슬리면 신문칼럼 한 꼭지도 실정법위반으로 고발당한다. 도그마 앞에서는 엄밀한 과학마저도 비틀거린다. 재앙의 판도라 상자처럼 위험하다는 원전이 외국에는 안전한 에너지로 수출된다. 기막힌 변신 아닌가.

공상 같은 우상의 계절을 살아가는 우리 국민은 그러나 오랜 역사의 굴곡을 거치면서 자유의 빛과 전제(專制)의 그늘을 뼈저리게 체험해왔고, 그 역사적 경험은 국민의 의식 속에 정치적 이성으로 뚜렷이 새겨졌다. 자유를 짓밟는 독선·이념·위선·선동의 우상을 타파하는 힘은 오직 주권자의 경험적 분별력과 이성적 판단력뿐이다. 그 힘이 우상을 파괴하는 ‘영원한 자연과 경험의 빛’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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