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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천년 절집에 들어 매화를 탐하다

[여행] 천년 절집에 들어 매화를 탐하다

기사승인 2020. 03. 03.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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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통도사 (3)-1
통도사 홍매화. 한기를 뚫고 고결하게 핀 꽃 한송이가 퍽퍽한 삶에 큰 위안이 된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계절이 계절인지라 매화(梅花) 이야기를 꺼내든다. 남녘의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리며 겨울의 흔적을 열심히 지우고 있다. 칼바람보다 매서운 바이러스로 방방곡곡이 얼어붙은 마당에 느닷없는 꽃타령이 웬말이냐고 쏘아붙일지 모를 일이지만 그래도 꽃은 피고 봄은 온다.

매화는 지난한 겨울의 끝자락에, 또는 한기가 가시지 않은 봄의 선두에 핀다. 황량한 들판에 꿋꿋하게 핀 꽃 한 송이가 건네는 위로는 생각보다 크다. 고단한 겨울을 버틴 민초들에게 계절의 바뀜을 알리는 매화는 오늘보다 나은 내일에 대한 기대였고 희망이었다. 동토에 뿌리를 내리고 눈 속에서 맑은 향기를 뿜는 매화를 선비들은 고결함의 상징으로, 의지와 인고의 표상으로 여겨 흠모했다. 무턱대고 꽃구경 나서기가 조심스럽지만 가슴에 ‘희망의 꽃’ 한 송이를 품고 ‘난리’를 이겨 낼 의지를 곱씹는 일은 해볼만하다. 그래서 꺼내든 매화다.
 

통도사 (6)-1
통도사 홍매화는 사찰을 창건한 자장율사의 법명을 따 ‘자장매’로 불린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이름난 매화농원의 대규모 ‘꽃밭’은 눈이 번쩍 뜨일 만큼 화려하다. 고즈넉한 사찰 마당의 오래된 나무에서 핀 매화는 또 고상하고 우아한 멋이 있다. 각각 나름의 매력이 있지만 ‘고고한 자태와 그윽한 향기’에 조금 더 어울리는 것은 후자같아 보인다. 찾아보면 매화로 이름난 고찰이 적지 않다.

몇 곳 훑어 보면, 경남 양산의 통도사가 그렇다. 신라시대 자장율사가 창건했다고 전하는 이 고찰은 불보사찰이다. 불교에서는 불(佛)·법(法)·승(僧)을 세 가지 보물로 여긴다. 불보사찰에는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모셔졌다. 경남 합천 해인사는 말씀(대장경)을 모신 법보사찰, 전남 순천 송광사는 고승을 배출한 승보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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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도사 대웅전. 네 개의 면에 각각 출입문이 있고 출입문마다 현판이 걸린 독특한 형태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여행/ 통도사 삼층석탑
통도사 삼층석탑/ 한국관광공사 제공


묵직한 타이틀에 걸맞은 내력도 내력이지만 매화로도 소문난 통도사다. 일단 영각(고승의 초상의 모신 전각) 앞의 홍매화가 유명하다. 사찰을 창건한 자장율사의 법명을 따 ‘자장매’로 이름이 붙었다. 수령은 약 370년으로 추정되는데 순한 바람을 타고 흔들리듯 뻗은 가지, 이 끝에 전구처럼 달려 영롱한 빛깔을 뽐내는 꽃이 볼수록 탐스럽다.

깃든 이야기도 흥미롭다. 통도사의 가람들은 조선시대 임진왜란을 겪으며 대부분 소실됐다. 1643년 중창에 나선 우운대사가 대웅전과 영각 등을 복원했다. 이 때 상량보를 올리고 낙성을 마쳤더니 마당에 매화나무가 자랐고 음력 섣달에 연분홍 꽃을 피웠다. 사람들은 이를 자장율사의 뜻이 전해진 것으로 여겨 자장매로 불렀다. 다음으로 극락전 옆의 홍매화 두 그루도 잘 알려졌다. 하나는 연한 분홍색의 ‘담홍매’(분홍매), 다른 하나는 진한 분홍색의 ‘만첩홍매’다. 천천히 짚어가며 살피다보면 그윽한 매향이 가슴으로 느껴진다.

통도사는 매화 말고도 볼거리가 참 많다. 대웅전 및 금강계단(국보 제290호)은 꼭 봐야한다. 대웅전은 건물 네 개의 면에 각각 출입문이 있고 출입문마다 각각 다른 현판이 걸려 있다. 하나의 건물이자 네 개의 건물인 셈.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신 사찰의 대웅전에는 불상이 없다. 이곳 대웅전도 그렇다. 대신 건물 뒤에 조성된 금강계단에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모셔졌다. 영산전(보물 제1826호)에선 다보탑을 그린 ‘견보탑품도’를 비롯한 벽화들(보물 제1711호)을 봐야 한다. 옹골차면서도 단아한 멋이 깃든 통도사 삼층석탑(보물 제1471호), 석가모니의 발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봉발탑(보물 제471호) 등 눈 돌리는 곳마다 ‘보물’이다. 가람들의 현판과 전각 중에는 흥선대원군 이하응, 추사 김정희의 글씨도 있다. 하나 더 추가하면 통도사 산문 무풍교에서 일주문까지 이어진 약 1km의 ‘무풍한송로’는 봄날 산책하기 제격인 울창한 소나무 숲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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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담과 어우러진 선암사 홍매화/ 한국관광공사 제공


전남 순천 조계산 선암사에는 사찰 이름을 딴 ‘선암매’가 있다. 원통전 담장 뒤편의 백매화와 무우전 돌담길을 따라 늘어선 수십그루의 홍매화 중 가장 우람한 나무 두 그루가 그것. 모두 약 600년 전에 천불전 앞의 와룡송과 함께 심어진 것으로 전한다. 특히 돌담과 홍매화가 어우러진 풍경이 서정적이다. 선암매는 천연기념물(제488호)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매화는 많지 않다. 이를 포함해 경내에는 오래된 매화나무 수십여그루가 터를 잡고 자란다.

선암사 역시 내력이 깊다. 한국불교에서 조계종 다음으로 큰 종단인 태고종의 본산이다. 신라시대에 창건한 것으로 전하며 고려시대에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크게 번성했다. 수차례 전란으로 소실과 재건을 반복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조선시대에는 자식이 없던 정조가 이곳에서 100일 기도를 올린 후 아들(순조)을 얻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만큼 건강한 기운이 넘치는 사찰이다.
 

여행/ 선암사 승선교
선암사 승선교. 아치형 다리 하부 아래로 강선루가 보인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곳곳에 볼거리가 많고 깃든 이야기도 풍성하지만 잘 알려진 것은 일주문 앞 승선교와 해우소다. 승선교는 아치형으로 생긴 다리인데 이 곡선이 참 아름답다. 곡선의 다리 하부를 통해 강선루를 올려다보는 풍경이 일품이다. 선암사 해우소는 우리나라 사찰 해우소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해우소로 꼽힌다. 시인 정호승은 ‘선암사’라는 시에서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고 했다. 선암사의 해우소에서 ‘풀잎들이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줄 것이라며 ‘실컷 울어라’고 했다. 이 밖에도 순천에는 매화로 유명한 사찰이 많다. 조계산 자락, 선암사 반대편에 있는 송광사는 수령 약 200년의 ‘송광매’가 이름났다. 또 금전산 금둔사 역시 홍매화가 잘 알려졌다.  

여행/ 금둔사
금둔사 홍매화/ 한국관광공사 제공


전남 구례 화엄사의 각황전 옆 홍매화는 조금 독특하다. 빛깔이 하도 진해 검게 보인다고 ‘흑매’로 불린다. 수령은 약 300년. 조선시대 숙종 때 전각을 중건하고 심었단다. 단청을 하지 않은 각황전과 어우러진 홍매화가 어찌나 고혹적인지 딱 5분만 들여다봐도 아찔하다. 화엄사에서는 대웅전 뒤편 대나무 숲길을 걷다 만나는 구층암은 꼭 들른다. 매끈하게 뒤틀린 모과나무를 통째로 기둥으로 썼다.
 

여행/ 화엄사 홍매화
화엄사 홍매화. 진한 빛깔이 검게 보인다고 ‘흑매’로 불린다./ 한국관광공사 제공
화엄사2
화엄사 홍매화/ 한국관광공사 제공


마지막으로 가을 ‘애기단풍’으로 이름난 전남 장성 백양사에는 ‘고불매’가 있다. 불교에서 선원(禪院), 강원(講院), 율원(律院) 등을 모두 갖춘 사찰을 총림이라고 한다. 백양사는 한국 불교 5대 총림 가운데 하나인 고불총림이다. 이 기상과 분위기를 표현한다고 붙은 이름이 고불매다. 매화는 향적전 담장과 경계를 이루며 서 있다. 전체적으로 균형 있게 잘 자랐으며 고매의 품격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다.

백양사 곳곳에는 눈여겨 볼 나무들이 많다. 사찰 마당에 뿌리 내린 보리수나무, 일주문에서 경내로 드는 길에 도열한 갈참나무, 쌍계루 앞의 비자나무 군락지…. 특히 들머리의 갈참나무는 우람한 몸통에서 흩어지는 가지들이 신령스럽기 짝이 없다. 묵은 것의 아우라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들이 많은데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700년 수령의 갈참나무도 이 길에 있다. 쌍계루와 백학봉이 어우러진 풍경은 꼭 봐야한다. 하얀 바위 암봉, 이 아래 고상한 누각, 이것들이 데칼코마니처럼 반영된 연못이 어우러진 풍경이 바로 ‘백양제일경’이다.

통도사, 선암사, 화엄사, 백양사…. 꽃잎 다 떨어져도 본전은 건질, 가볼만한 고찰이다. 오래된 사찰 마당에 은근하게 퍼지는 곰삭은 시간의 향기를 좇는 것도 기분 참 상쾌해질 일이다. 당장 가보지 못하더라고 힘든 시간 지나가면 마음 추스릴 곳으로 메모해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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