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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돌 맞은 SK, 최종현 선대회장서 최태원 회장까지...

67돌 맞은 SK, 최종현 선대회장서 최태원 회장까지...

기사승인 2020. 04. 0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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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선경직물 창업, 인조견 주력
'닭표 안감'으로 韓·홍콩 이름 날려
석유~섬유 수직 계열화 비전 아래
미래기틀 다질 성장동력 발굴 착착
유공·한국이동통신·하이닉스 인수
체질개선 성공…재도약 기반
sk
SK의 67년 역사의 출발점에는 수원 토박이인 두 형제가 자리한다. 큰 형은 국내 최고의 직물공장을 만들겠다고 꿈꿨고, 아우는 형이 창립한 회사를 세계 100위 안에 드는 기업으로 만들겠다고 했다. 두 형제의 꿈은 이뤄졌다. 전쟁 폐허 속 설립한 직물공장이 매출 140조원이 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故최종건 창업회장(첫째)과 故최종현 선대회장(둘째)의 ‘형제 경영’을 시작으로 현재 최태원 SK그룹 회장까지 SK의 60여년간 역사를 살펴본다.

최 창업회장은 1944년 4월 당시 일본이 운영하던 선경직물에 입사해 18살 어린 나이에 생산부 조장 자리에 올랐다. 이후 생산부장까지 승진했으나 섬유 장사를 하겠다며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나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공장이 불에 타 잿더미로 변했고, 1953년 4월 폐허가 된 공장부지를 매입해 자신의 손으로 직접 공장을 재건해 선경직물을 창업했다. 최 창업회장은 이듬해부터 선경직물의 인조견 안감에 ‘닭표 상표’를 붙이기 시작하면서 섬유 업계의 강자로 부상한다. 닭표 안감은 다른 인조견과 달리 빨지 않고 바로 재단할 수 있고 조직이 매끄러워 인기를 끌었다. 닭표 안감이 너무 잘나가자 여기저기서 가짜 닭표 안감이 기승을 부려 상인들이 오히려 단속을 해달라고 할 정도였다.

성공 뒤에는 바로 실패와 고난도 따라왔다. 1959년, 사라호 태풍과 대일통상 중단 조치로 회사가 힘들어졌다. 최 창업회장은 직원들에 “이 사람들아,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지!”라며 폴리에스테르 제품 생산에 돌입했고 불황 속에서도 공장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후 선경직물은 홍콩에 안감을 수출하면서 국내 최초 인견직물 수출기업이 된다.

1962년, 최 창업회장의 동생 최종현 선대회장이 선경직물 부사장으로 합류한다. 미국 시카고대학 대학원을 졸업한 최 선대회장이 합류하면서 형제의 사업은 더욱 날개를 달기 시작했다. 닭표 안감 이후 봉황새 이불감, 곰보 나일론, 깔깔이 등을 연달아 히트시키며 선경직물은 섬유업계서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다. 특히 봉황새 이불감은 당시 예비신부들로부터 꼭 준비해야 할 필수품이 될 정도로 인기였다.

이후 폴리에스터 원사 공장을 준공, 선경합섬을 설립했으며 원사 생산에 돌입했다.

1973년에는 최 창업회장의 서거에 따라 최종현 사장이 선경그룹 회장으로 선임됐다. 최 선대회장은 SK를 ‘석유에서 섬유까지’수직계열화를 이루겠다는 비전을 선포하면서 선경석유를 설립(1973년)한 뒤 1980년 대한석유공사(유공)합작사인 걸프 보유 지분 인수를 위해 직접 TF를 이끌었다. 결국 지분 인수에 성공하면서 SK는 유공의 1대 주주가 됐다. 같은해 최 선대회장은 당시 대통령 뜻에 따라 “세계에서 으뜸가는 호텔”로 만들기 위해 워커힐 호텔을 인수, 호텔업에 발을 들이며 서비스 관광 사업 확장에도 나섰다.

최 창업회장이 SK를 만들었다면 최 선대회장은 SK의 미래를 위한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 중 대표적인게 정보통신분야의 진출이다. 1984년 최 선대회장은 미국에 미주경영실을 설립해 정보통신분야가 미래 성장동력이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직원들을 통신사에 파견하는 방식으로 통신업 진출을 위한 발판을 차근히 마련해나갔다. 이후 SK는 제2이동통신사업자로 선정됐지만 특혜시비로 사업권을 자진 반납했고 2년 뒤인 1994년 한국이동통신 민영화에 참여했다. SK텔레콤은 1996년 세계 최초로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기술을 상용화하면서 아날로그를 디지털로 바꾸는 도전에 성공했다.

최 선대회장은 해외유전 개발에도 적극 나섰는데, 1970년대 두 차례의 오일쇼크를 경험하면서 ‘자원이 무기’라는 것을 크게 느꼈기 때문이다. 이에 1984년 북예맨 유전개발에 성공해 산유국 대열에 올랐으며 SK는 9개국 13개 광구에서 일평균 5만5000배럴의 원유를 생산할 수 있게 됐다. 무자원 산유국의 꿈을 이뤄낸 것이다.

최 선대회장의 장남 최태원 회장이 취임한 때는 1998년 9월이다. 당시 우리나라는 IMF 위기였다. 환율, 유가, 금리 등 기업성과와 직결되는 경영환경이 급변하면서 대마불사로 불리던 대기업들이 사라지던 때였다. 이같은 위기상황에 최 회장은 취임 당시 “혁신적인 변화를 할 것이냐(Deep Change), 천천히 사라질 것이냐(Slow Death)”라고 밝히면서 근본적인 변화 없이는 생존할 수 없는 만큼 그룹의 체질 변화를 강조했다.

최 회장은 SK의 미래를 ‘글로벌’이라고 봤다. 해외시장 개척을 통해 SK의 사업구조를 내수에서 수출로 본격적으로 바꿔나갔다. 2002년에는 ‘따로 또 같이’경영을 선언하면서 그룹 지배구조의 변화를 선언했다. 이에 따라 최 창업회장의 장남 최신원씨는 SK네트웍스를, 차남 최창원씨는 SK디스커버리·가스 부회장을 맡았다. 앞서 최 선대회장이 ‘한솥밥 한 식구’라는 철학으로 회사를 경영하면서 노사분규없이 회사를 성장시킨 점, 인재양성에 힘쓴 점 등을 그대로 물려받은 모습이었다. 이같은 최 회장의 경영 방침에 취임 당시 34조원이던 SK그룹 자산은 지난해말 218조원까지 6배가 늘었다.

최 회장은 ‘뚝심’과 ‘강한 리더십’으로 유명하다. 최 회장의 스타일을 보여주는 대표 사례로는 SK하이닉스 인수전이 있다. SK하이닉스 인수합병은 아직까지도 SK의 사업 포트폴리오에 있어서 ‘신의 한 수’로 불린다. 실제 SK는 하이닉스 인수로 사업체질을 변화시켰다. 인수할 때만 하더라도 반도체 글로벌 시장의 가격 하락으로 그룹 안팎에서 부정적 의견이 팽배했다. 그러나 최 회장은 반도체의 기본 원리, 세계적 기술 동향 등을 전문가들과 함께 서울 모처에서 직접 공부하면서 인수를 마음먹었고, 반대 의견했던 여론을 설득시키며 결국 SK하이닉스 인수에 성공하게 됐다. 2012년 3월 SK하이닉스 출범 당시 최 회장은 “34년만에 선친이 꾼 반도체의 꿈을 이뤘다”고 밝힌 바 있다. 앞서 최 선대회장이 선경반도체를 설립했다가 접었는데 30년만에 아버지의 꿈을 아들이 이룬 것이다. 현재 SK하이닉스는 명실상부 SK그룹의 영업이익 80%를 담당하고 있는 효자로 등극했다.

2017년에는 SK실트론을 인수했으며 최근에는 미국 듀폰의 웨이퍼사업부를 인수했다. 제약분야 위탁개발 생산업체 임팩을 인수, 미국 캘리포니아 새크라멘토에 의약품 위탁생산회사 통합법인인 ‘SK팜테코’를 설립하는 등 제약 바이오 분야에도 힘쓰고 있다. 특히 2011년 SK지주사 산하에 있던 생명과학사업부문을 물적분할해 신설법인으로 설립, ‘SK바이오팜’의 상장도 눈앞에 두고 있다. 현재 SK이노베이션은 2022년 생산을 목표로 미국 조지아주에 17억 달러 규모의 전기차배터리 공장을 건설 중이며 SK종합화학은 다우케미칼로부터 에틸렌아크릴산, 폴리염화비닐리덴 사업을 인수하면서 고부가 화학사업을 추가하면서 다양한 사업 포트폴리오 확장에 나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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